“시몬, 나뭇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그대는 좋은가 낙엽 밟는 발자욱 소리가?.....” (구르몽의 ‘낙엽’중에서)사춘기 무렵 처음 이 시를 알고부터 해마다 가을이 되면 예외 없이 이 시를 떠올리곤 했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뒤덮인 공원길을 혼자 걸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이 싯귀절을 읊조리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대는 좋은가 낙엽 밟는 발자욱 소리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해마다 가을이면 수없이 되뇌곤 했던 이 싯귀절. 그런데,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새삼 깨닫고 놀랐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오면 그저 삽상한 바람 냄새가 좋고, 눈이 시리도록 맑고 높은 하늘이 좋고, 흐드러지게 물드는 자연이 좋고, 풍성한 결실이 좋고… 그래서 바람에 우수수 흩어져 날리는 낙엽이 좋고, 그 걸 밟는 소리도, 태우는 냄새도 모두가 그냥 좋았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시골집은 담장이 없는 대신 집둘레에 버드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감나무, 밤나무 같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집 뒤에는 조그만 숲이 있어서 가을이면 집 마당과 주변이 온통 낙엽으로 뒤덮이곤 했다. 그 당시에는 산에도 지금처럼 나무들이 많지 않아서 가을이 되어도 산들이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물드는 풍경을 보기 힘들었지만, 우리 집엔 늘 낙엽이 쌓이곤 해서 남들보다 한결 더 가을의 정취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쌓이는 그 낙엽들을 갈쿠리로 끌어 모아 집 모퉁이에 수북이 쌓아올리는 일은 늘 내 차지였다. 어른들이 시키는 다른 집안일들은 뭐든 하기 싫었지만, 이상하게도 낙엽을 끌어 모으는 일은 그리 싫지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가을의 그 삽상한 공기와 명징한 하늘과 낙엽냄새와… 그런 것들에 마음이 끌렸던 듯 하다.
지금도 가을이 되면, 그 때의 감 냄새 같기도 하고, 군밤 냄새 같기도 하고, 햇살에 잘 말린 빨래 냄새 같기도 한 그 낙엽들의 향기와 서걱거리는 소리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기를 지나면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단연 가을이었다. 가을은 봄의 그 나른함이 없어서 좋고, 여름의 그 후덥지근한 늘어짐이 없어서 좋고, 또 겨울의 춥고 삭막함이 없어서 좋았다. 가을과 함께 따라오는 결실, 사색, 독서 같은 말들은 물론이고, 쓸쓸함, 허전함, 고독 따위마저도 그냥 좋았다.
이제 또다시 나무들이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물드는 이 계절에 나는 문득 구르몽의 저 ‘낙엽’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사춘기 이후 해마다 가을이면 적어도 몇 번씩은 되뇌었을 이 시를 지난 몇 년간은 까맣게 잊고 살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져 까마득히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소녀의 얼굴처럼 새삼스레 불쑥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그대는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좋으냐고…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어느 새 슬그머니 여름으로 바뀌어 있었던 듯 하다. 여름의 그 작열하는 태양이 좋고, 우거진 나무들이 좋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들꽃들이 좋고, 야외 페티오 술꾼들의 그 시끌벅적함이 좋고, 온갖 짐승, 곤충, 날벌레, 풀벌레들의 북적거림이 좋아졌다.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여름이 지나 서서히 물들어 가는 나뭇잎들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하나 둘 색깔이 변해가는 내 머리로 눈이 가고, 낙엽이 떨어져 엉성해진 나무들을 바라보면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연락이 닿은 옛 친구가 보내온 사진속의 낯설게 늙수그레한 친구의 모습을 보는듯하여 민망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저 구르몽의 시가 내게 던지는 질문이 곤혹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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