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경(은목 회장/ 티넥)
대학에서 독수리 금뱃지가 붙어있는 넥타이핀에 붙어있는 금뱃지를 떼어서 건축헌금으로 바쳤다. 지금 와서 50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면, 그 당시의 열정이 희석되어서 인지 그 기념품만은 그대로 간직할 것을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만큼 정열이 희석된 증좌가 아닐까 하고 돌이켜 본다.독수리 상을 받은 자부심이랄까...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만큼 나는 외길만 보고, 마땅히 둘러보아야 할 옆은 보지 않고 앞만을 향해서 달렸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평탄한 길을 갈수도 있었지만 나는 어리석은 고난의 길을 택하여 고집스러운 궤도를 달렸다. 미련한 탓이었을까, 설명하기 어려운 교만의 탓이었을까? 큰 교회에서 미자립(未自立) 교회로, 미자립 교회에서 개척교회로, 개척교회에서 국경을 넘
어 멕시코 빈민촌으로...
국경에 가서 수년 동안 폐쇄되었던 교회에 간판을 다시 만들어 달고 뿔뿔이 흩어져 간 교인들을 다시 찾아 모으고, 그리고 또 국경을 넘어가 멕시코 빈민촌(Accuna,Mexico)에 가서 ‘철길 먼지마을 교회를 세워 4년간 선교를 펼쳤다. 나는 국경을 넘나들면서 두 교회를 섬기는 길에서 은퇴의 길에 들어섰다. 그 이유는 세월의 탓이었다.
아직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고 눈이 흐려지지 아니 하였으나 세월과
세대가 나의 발걸음을 은퇴의 길로 옮기게 하였다.“ ...산촌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고 읊은 옛시조(길재)는 이런 데서 연유한 것인가?
70의 나이에 나는 이 열사막(熱砂漠)의 국경에서 흔히들 은푀의식(儀式)도 없이 주일 예배로서 은퇴를 알리고, 이별의 손 흔들어 주는 이도 없는 마을을 뒤로 하고 귀로에 올랐다. 멕시코와의 국경, Rio Grand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멕시코의 아꾸냐와 텍사스의 델 리오, 두 소읍(小邑)을 떠나 뉴욕까지 2,040마일의 길을 서서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나의 가는 앞길에 아직 남겨진 무슨 일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리로 떠나갈 때에 빈 손이었기에 돌아올 때도 빈 손이었다. 가다가 멈추어 쉬고, 쉬고서는 다시 가고 하기를 거듭하면서, 보통 하루이틀이면 가고 오는 길을 나는 6일 을 걸쳐 서서히 동북쪽으로, 동북쪽으로 길을 갔다. 행선은 뉴욕이지만 거기 가서도 우선 정해진 머리 둘 곳이 없었기에 여로(旅路)를 재촉하지 않았다. 머리 둘 곳이 없는 행로였지만 그런 가운데도 “어서 가야한다”는 마음은 서둘러졌다. 이는 어디론가에 가야한다는 여로(旅路)의 알 수 없는 정서(情緖)였을 것이다.
다섯 밤을 돌아오는 길의 모텔에 머물면서 가랑이 찢어지는 여린 발걸
음으로 나를 따라다녔던 열(烈, 아내의 별칭)의 얼굴을 훔쳐보곤 하였
다. 뉴저지에 돌아와서는 출가한 딸의 시골집에 우선 짐도 없는 여장
을 풀었다. 여기에서도 오래 머물러 있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기숙하는 곳으로 나가야, 해질 무렵에 찾아 온 농부에게도 포도원의 문은 열릴 것이라는 소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뉴욕으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플러싱, 교회 가까운 처남 장로의 집으로 옮겨 몇 주일을 머물렀다. 이제 더는 옮겨 갈일이 없는 긴 여로의 마지막 쉼터로 여겨져서인지 아내의 얼굴에는 휴식의 평안이 드리운 듯하였다.
자원하여 기쁘게 맡은 사역의 길을 앞장서 달리다가 은퇴하고 70나이를 넘겨 여기에 돌아오기까지, 나의 마음의 한 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던 공허, 독수리 상을 탔을 때의 겹친 감격과 기쁨, 자랑스러움, 서재에 늘 진열되어 있던 상패와 상장들을 보면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고 늘 허전했던 동공을 발견하였다.
긴 여로에 지친 아내의 얼굴에 깃든 휴식의 평안한 모습을 보았을때, 나는 아내의 얼굴에 독수리의 눈물이 번져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제까지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으로 피로를 모르고 홀로 앞장서서 달리기만 하던 나는 아내의 얼굴에 주름이 가고, 검은 머리에 숨겨진 흰머리카락을 보지 못하고 세월을 보낸 것이 마음에 저려왔다.
나는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으로 피로를 몰랐던 그 모든 순간순간에, 내가 받은 독수리 상패와 상장 위에, 아내의 수고와 고통을 못 보았던 나의 회한의 눈물이 흘러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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