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조 / 전직 교사
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나의 아버님를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님은 언제나 원고지가 수북히 쌓인 작은 밥상 앞에 단정히 앉으셔서 글을 쓰고 계셨다. 생전에 아버님을 만나보셨던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아버님의 강연을 꼼짝없이 들으셔야만 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현행 한글 맞춤법이 얼마나 세종대왕의 귀하신 뜻을 망각하고 국민을 혼란하게 하고 있는지 열정적으로 설파하셨다.
나의 할머니는 1893년에 김포의 농사하는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학교는 문에도 못 가보시고 15살에 결혼하셔서 다섯 남매를 낳으시고 그 시절 거의 모든 여성들이 살아간 길을 사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무나 글을 읽고 싶어 끼니 때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땔 때 부엌바닥에 나뭇가지를 연필 삼아 혼자서 한글을 깨우쳤다"고 하셨다. 세종대왕이 꿈꾸셨던 ‘스승없이 깨우치는 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이야기이다.
또 지난번 유투브에서는 ‘400년전의 곽재우 선생의 조카며느리의 묘이장’ 을 방영하며 그곳에서 오래된 언문 편지를 170여장 발견하였다 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거기서 사위가 장모에게 자기 자녀들에게 언문을 열심히 가르칠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는데 이것은 한글이 여자들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감동적인 사실이다.
할머니가 손주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소치는 목동이 어린 동생을 가르칠 정도로 쉬운 문자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지금 한글은 어렵다.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대학을 나와 지식이 높아갈수록, 학교 교사가 되어도 철자법을 틀린다. 인터넷에서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의 비명이 "한글은 아주 배우기 어려운 글자다" 라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처럼 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재외 동포)들은 누구나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손주들에게 혹은 외국인들에게 한글을 처음 가르칠 때 ‘아버지’ ‘어머니’ ‘가지’ ‘나비’ 까지는 곧잘 배우고 쓰다가 ‘할아버지’로 진도가 나가면 영락없이 ‘하라버지’ 로 쓰고 만다.
소리 나는대로 쓰게 만든 세종대왕님의 방법을 저절로 아는 것이다. "입니다’’도 ‘’임니다’’로 쓴다. <ㅂ>이 <ㅁ>으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어머니(할머니)가 쓰시던 ‘구 언문 철자법’을 지금 젊은이들이 저절로 따라하고 있다. 그들은 받침을 다 연결해서 없애버리고 대화한다. ‘대단하다’ 를 ‘대다나다’ 라고 쓰기도 한다. ‘들어 와’ 는 ‘드루와’ 로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이 시대는 카톡세대이다. 어떻게 하면 더 빠른 속도로 문자를 보내는가 하고 웬만한 글자는 생략하고, 심지어 자음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세대이다. (예: ㅇㅋ= 오케이, ㅋㅋ, ㅎㅎ)
1933년에 지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한글은 점차 혼동 속에서 길을 잃고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왜 현행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들리지 않는 받침문자를 써 넣으라고 하는지? 외워야 할 변칙들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쉬운 글자를 만들기 원하셨던 세종대왕은 <소리글자(표음문자)>를 만드셨는데 작금의 한글학자들은 한글학자라는 이름 뒤에서 한글을 한문처럼 고급화(?), 고상화(?)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곧 <뜻글자(표의문자)>화 하고 있다.
한글은 세종대왕께서 무지한 백성들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귀족과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드신 글자이다. 세계 역사를 모두 뒤져봐도 국민을 위하여 문자를 만드려고 노력한 왕은 없었다. 세계의 모든 다른 문자들은 사물의 모양을 따라 만들었으나 한글은 발음 기관을 본 따 만들었다.
서양이 20세기에 들어서 완성한 음운 이론을 세종대왕은 그보다 5세기나 앞서서 체계화했고, 한글은 전통철학과 과학이론이 결합한 세계 최고의 문자이다.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라고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고 세계의 강국이 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그 빠른 통신의 혜택을 누리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한글의 과학적인 기능이었다. 한국이 세계 정보통신 순서의 1위에 오를 수 있고 IT 강국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한글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이 계획하셨던 ‘귀신의 소리, 학의 울음소리도 적을 수 있다’ 는 훈민정음이 영어의 F, V, TH, R,L 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세상의 어떤 소리도 문자로 적을 수 있다던 호언장담이 무색해져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으니 우리는 모든 소리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자를 가졌다는 것이다. 문자에 점이나 선을 첨가하여 새로운 발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문자의 발음은 약속이다. 약속으로 새 문자를 만들면 그야말로 완벽한 세계 공용문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글이다. 왜 바보같이 FRY 를 ‘프라이’라고 발음해야 하나? 한글은 얼마든지 국제적인 문자로 사용할 수 있는 온 세계의 말을 모두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문자이다.
아버님 돌아가신지 어언 20년이 되었고,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가고 있다. 그 옛날 홀로 그 이치를 깨달아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싸우시던 아버님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계시어 젊은이들이 SNS에서 사용하는 ‘소리나는대로 쓰는 맞춤법’을 보신다면 박수를 치며 기뻐하셨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의 <한글 간소화 파동>이라는 사건을 기억하고 계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결국 아버님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2년 여를 분투하시다가 쓸쓸히 퇴장하셨다.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서 공부하신 분으로 복잡한 한글 맞춤법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한글을 쉽게 만들자는 아버님의 연구를 기뻐하셨고 육당 최남선 선생도 아버님 책에 기꺼이 서문을 써 주셨다.
아버님은 당신의 연구가 완벽한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으셨다. 다만 국어를 연구하는 후학에게 자그마한 도움이 되고, 연구의 단초를 만들어줄 작은 불꽃이 되기만을 희망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나의 남동생이 아버님께서 쓰셨던 모든 글을 한 권에 모아 ‘하오 정경해 국어학 논총’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여 모든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제 곧 통일이 올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다. 통일 후 우리는 분명히 남과 북이 같이 사용할 수 있는 통일 철자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 때 혼란해 하며 쩔쩔 매기 전에 우리는 합리적이며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우리의 문자 훈민정음을 온 국민은 물론 외국인도 쉽게 배우며 온 세계인이 사랑할 수 있는 문자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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