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초’라는 말과 인연이 깊다. 여러 면에서 ‘최초’이다. ‘최초의 신대륙 (남미) 출신 교황’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최초로 성 프란치스코 이름을 택한 교황’ 등이 대표적이다. 가톨릭 교회사에서 의미가 있는 기록들이다.
하지만 그의 ‘최초’가 최초라서 감동을 주는 것은 보다 일상적인 일들이다. 교황이 자신의 의지 혹은 믿음에 따라 결정한 사안들인데 참 여러 가지다.
2013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교황의 상징인 빨간 벨벳망토와 빨간 구두를 거부하고 검정 구두에 소박한 예복을 입은 것, 기사 딸린 교황전용 차량 대신 소형차를 직접 운전하는 것, 외국 방문 시 방탄차를 거부하고 검소한 일반차량을 이용하는 것, 생일 축하잔치를 노숙자들과 함께 한 것 등 이전 교황들에게서는 볼 수 없던 일들을 그는 서슴없이 하고 있다. 교황에게 부여되는 모든 권위를 내려놓는 것인데 그 과정에 갈등이 없어 보인다.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2일부터 5박6일 일정으로 미국을 찾았다. 대중적 인기가 록스타 수준인 교황을 맞으며 가톨릭 신도들은 감격하고,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들 역시 환영 열기가 뜨겁다. 그렇다고 모두가 교황의 방문을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교황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정체성’을 의심받는다는 점에서 또 ‘최초’인 교황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자로, 마르크스주의자로, 리버럴로 의심받고 있으며, 공화당으로부터는 민주당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동성애를 옹호하고, 낙태를 허용한다는 의혹도 없지 않다.
이런 의구심들에 대해 교황은 “나 리버럴 아니다” 라며 가볍게 넘기기도 하고, 설명을 좀 하기도 한다. 그가 가장 비판하는 것 중 하나는 ‘돈의 제단’을 쌓고 있는 현 자본주의 체제이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강하게 비판하자 “당신 마르크스주의자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는 좋은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 그의 반응이었다.
교황을 향한 환호 그리고 비난의 근거를 따라가 보면 뿌리는 같다. 사람 사랑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에 대해 갖는 무조건적 사랑, 사람을 모든 이념과 사상, 가치 위에 두는 인간존중이 한쪽에서는 감동을, 다른 쪽에서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처음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세상의 끝’에서 온 교황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했다. 유럽 출신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 출신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교황은 바티칸으로 오고 나서도 눈길이 줄곧 세상의 끝으로만 향하고 있다.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밀려나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가없는 연민이다.
이번 미국 방문 중에도 그는 연방의사당에 잠깐, 유엔본부에 잠깐 들러 연설을 했지만 같이 식사를 하고 마음을 담아 이야기를 나눈 대상은 이 사회의 변두리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이었다. 워싱턴의 노숙자들, 뉴욕 이스트 할렘의 빈민층 학생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교도소 죄수들이었다. ‘사람 사랑’이 못 가진 자들을 돌아보게 하고 그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교회는 영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교황은 우리에게 ‘사람을 보라’ 하고, 우리는 ‘사람’ 대신 그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다. ‘손가락’ 즉 이슈를 보면 그것은 사회적 부담이다. 24일 연방의회 연설에서 교황은 미국 내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선처를 당부했다. 불체자 이슈, 그 많은 ‘숫자’에 놀라 뒤로 물러나는 대신 ‘사람’을 보고 끌어안으라고 촉구했다.
‘손가락’ 대신 ‘사람’을 보면 용서와 자비가 가능하다. 9월 초 교황은 낙태한 여성을 용서하라고 해서 가톨릭 보수진영의 반발을 샀다. 진심으로 속죄하는 여성에 대해 낙태의 죄를 사할 권한을 사제들에게 한시적으로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교황은 고국인 아르헨티나에서 낙태 합법화 움직임에 강력히 반대한 전력이 있다. 죄 보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에게는 먼저이다. 그렇게 동성애자를 품고, 마약 중독자를 품고, 범죄자를 품는다.
미국사회의 양극화가 심각하다. 진보·보수의 정치적 이념 대립, 인종 갈등, 경제적 불평등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우리가 ‘사람’을 먼저 보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생명으로서 다른 생명의 아픔을 느낄 때 공존은 가능하다. 교황의 파격적인 사람 사랑의 모습을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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