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이 들어 있는 이번 달 오바마 대통령은 노동운동과 관련해 잇달아 의미 있는 연설을 했다. 노동절을 기념해 백악관에 제작한 동영상 연설에서 대통령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보편적 권리들은 이를 위해 투쟁한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또 노조간부들 앞에서 행한 한 연설에서는 “노조나 노동운동이 없는 나라의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착취와 고통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이는 대통령 개인의 소신이지만 동시에 노조와 노동운동에 대한 민주당의 우호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인들의 개인소득 추이를 살펴보면 분배에 좀 더 관심을 쏟는 민주당 정권 아래서 경제적 하위계층의 소득 증가율이 공화당 집권 시절보다 한층 더 높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증가율이 수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노동운동은 분명 노동자들의 삶의 개선에 절대적인 기여를 해 왔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확인되는 시기는 1950년대 미국이다. 당시 미국의 육체노동자들은 대졸 학력자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물론 그들의 사회적 지위도 지금보다는 훨씬 높았다. 전후 제조업 붐이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노조의 활성화였다. 뉴딜정책의 영향이었다.
강력한 노조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켜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많은 기업들은 근로자들의 노조 가입을 막으려고 자발적으로 임금인상을 실천했다. 그러면서 아주 두꺼운 중산층이 형성됐다. 경제적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의 격차가 크게 좁혀졌다고 해서 경제학자들이 ‘대압축’(Great Compression)이라 이름 붙인 바로 그 시기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퍼리치들과 기업가들이 권력을 쥔 ‘금권정치’가 미국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은 활기를 잃고 노조는 고사당했다. 미국의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진보의 정치적 상상력 또한 점차 고갈됐다.
미국의 대표적 노동사 연구자인 스티브 프레이저는 1980년대 이후 미국을 ‘묵종의 시대’(Age of Acquiescence)라고 부른다. ‘묵종’은 아무런 저항 없이 묵묵히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입은 다문 채 힘 있는 자, 가진 자의 시혜만을 바라는 태도이다. 금권에 의한 노조분쇄가 성공을 거두고 매스미디어에 의해 개인 소비주의가 확산되면서 경제적 약자의 처지를 대변하는 정치적, 사회적 연대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2014년 현재 미국의 노조가입률은 11.1%에 불과하다.
프레이저는 ‘묵종의 시대’와 이전 시대를 아주 간결하게 비교 정리한다. 1960년대 미국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시대정신이 지배했지만 ‘묵종의 시대’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여기던 그 시절에는 연대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개인적인 것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런 지경에 이른 데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교묘한 심리 조작, 즉 ‘국가가 만들어내는 망상증’(state-sponsored paranoia)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프레이저는 지적한다. 얼마 전 한국에서 여당대표라는 사람이 “대기업 강성노조가 휘두르는 쇠파이프만 없었다면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겼을 것”이라며 노조혐오를 부추겼다. ‘귀족노조’ ‘폭력노조’는 노조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데 가장 많이 애용(?)되는 프레임이다. 연대가 허물어지고 저항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유례없는 경제적 불평등뿐이다.
언제쯤 이런 현실에 대한 보편적 자각이 가능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프레이저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 대선 레이스에서 일고 있는 ‘샌더스 신드롬’을 통해 그런 자각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희망적 징후를 찾아보게 된다. 미국인들의 전반적 진보 추세를 고려할 때(올해 갤럽이 조사한 의식조사에서 자신을 사회적 진보라고 밝힌 비율이 보수라고 밝힌 비율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더욱 그렇다.
연대를 불온시하고 개인적인 상황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만 환원하려는 ‘묵종의 시대’가 지속되는 한 힘없는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 존중받는 삶, 좀 더 평등한 사회는 한낱 신기루일 뿐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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