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의 대표적 실버타운인 실비치 레저월드에서 얼마 전 ‘사건’이 있었다. 그곳 주민인 한인여성이 세탁장에 갔다가 갓 이사온 백인 할머니를 만났다. 그 할머니가 물었다.
“당신 코리안?” “그래요, 코리안 아메리칸이에요.”그러자 백인 할머니의 입에서 상상도 못하던 말이 터져 나왔다. “난 코리안 싫어. 당신들 코리안, 한국으로 가버려!”
순간, 그 여성은 너무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가서 한바탕 싸울까”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흥분한 그를 말린 사람은 레저월드 한인회장을 지낸 그레이스 김(84)씨였다. 북가주에서 교육가로 오래 일하다 이곳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김씨는 미국에 산지 54년이 되었다. 노골적인 차별, 은근한 차별, 심각한 차별, 사소한 차별 … 다양한 형태의 인종차별을 숱하게 보아왔다.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백인 우월주의는 이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언성 높이며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될 일이 아니다. 법적으로 처리할 일이다.
그는 레저월드 관리 사무실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담당 소셜워커가 그 할머니를 찾아가 다시는 인종차별적 언행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게 할 예정이다. 커뮤니티 관리규약에 관련 규정이 있어 이를 반복해 어길 경우 퇴거 조치할 수 있다.
요즘 공화당 대선지명전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의 막말들을 듣다보니 레저월드 ‘사건’이 떠올랐다. “코리안 싫다, 가라”는 할머니와 “미국이 다른 나라들 쓰레기 처리장이 되고 있다”는 트럼프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백인우월 ? 인종차별주의가 뇌리에 박힌, 이 사회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일부 구성원들의 저급한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말이다. ‘차별’이라는 치부를 좀 가릴 만도 한데 완전히 벌거벗고도 창피해하기는커녕, 박수갈채를 받고 있으니 이 사회에 똬리를 튼 외국인 혐오의 뿌리가 깊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이지만, 이민자들에게 친절하기만 한 나라는 아니다. 시집살이한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면 또 시집살이 시키듯, 먼저 자리 잡은 이민자들이 나중에 온 이민자들을 차별하는 텃세가 계속 반복되어 왔다. 단순히 새로 왔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 배척하고, 그런 차별과 탄압을 이 악물고 견뎌낸 역사가 모든 이민 커뮤니티의 역사이다.
이민자 반대 정서의 핵심은 불안이다. 외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경기가 나쁠수록 반 이민 정서가 강해지는 배경이다.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던 19세기 중반에는 특히 심했다. 이민 반대, 이민자 반대를 정강으로 내세운 당도 있었다. ‘아무 것도 몰라요(Know-Nothing)’ 당이다.
지금은 라티노가 트럼프에 의해 ‘쓰레기’ 취급을 당하지만 당시에는 아일랜드계가 가장 천대받던 이민자였다. 1845년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시작되면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물밀듯 미국으로 들어왔다. 대부분 배에서 내린 그곳,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지에 정착하고 가톨릭교회 부근에 모여 살아서 특히 숫자가 많아 보였다.
대도시가 ‘더러운’ 외국인들로 넘친다며 이민을 막아야 한다는 비밀조직들이 생겨나더니 급속히 세를 불려 정당이 되었다. 공식당명은 ‘아메리카 당’이지만 ‘몰라요’ 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비밀조직이었을 당시 누군가 조직에 관해 물으면 ‘아무 것도 모른다’고 대답하도록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민정책은 트럼프 저리가라 이다. 신규이민 금지, 미국거주 이민자의 투표 금지, 공무원 등 공직 진출 금지, 시민권 신청자격은 미국거주 21년 등을 내세운 이 당은 1855년 연방하원의석 43개를 차지할 정도로 한때 인기를 끌었지만 몇 년 후 와해되었다. 이민에 그토록 반대하는 정당이 미국에서 오래 갈 수는 없다. 하지만 백인들의 의식 속에서 ‘몰라요’ 당의 정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틈만 나면 등장한다.
미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와 레저월드라는 작은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민자 비하 막말을 늘어놓는 트럼프 등 후보들에게 화를 낸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법에 근거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능력 있는 2세들의 정계 진출을 돕고 유권자 등록을 해서 반드시 투표하며 정치력을 기르는 것이 기본이다.
19세기 중반 이민자라서, 가톨릭이라서 천대에 천대를 받던 아일랜드계는 똘똘 뭉쳐 힘을 길렀다. 그리고는 100년 후인 20세기 중반 아일랜드 이민 4세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 탄생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한인사회가 참고할 필요가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