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창흠(논설위원)
요 며칠 찬비가 내리더니 폭염의 기세는 한 풀 수그러들었다. 아침저녁은 선들선들해졌다. 하지만 한낮은 아직도 덥다. 더위가 한달음에 물러가지 않는다. 아쉬운 듯 꼬리를 내리지 않는다. 서운한 듯 자취도 감추지 않고 있다.
하늘은 높고 파랗다. 뭉게구름도 둥실둥실 떠다닌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나 보다. 가을의 정취도 점점 느껴진다. 자연도 부지런히 가을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9월은 가을의 문턱에 서 있는 달이다. 아직 더위가 남아 있기에 잔서지절(殘暑之節)이라고도 한다. 아직 무더위가 남아있음은 열매들이 무르익을 기회다. 그러기에 9월은 충만하면서도 아직은 완성될 수 없는 절기다.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지만 아직은 겨울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9월은 9라는 수가 지닌 의미와도 직결한다. 숫자 ‘10’이 완성이라면 ‘9’는 완성에 가까운 절정과 성숙의 의미이다. 숫자 ‘9’에는 단계적 순서에 따른 ‘최종’의 단계와 ‘최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에게 숫자 ‘9’는 가장 완전하고, 큰 수다. 조화와 완벽의 상징으로 여기는 숫자 ‘3’을 3배한 수로 여겼기 때문이다. ‘9’는 더할 나위 없이 높은 지고의 수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주 큰 키를 ‘구척장신(九尺長身)’이라 했다. 매우 먼 하늘을 ‘하늘 구만리’라 말한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겨우 살아남았다는 뜻의 구사일생(九死一生)과 깊은 궁궐을 뜻하는 구중궁궐(九重宮闕) 등도 그렇게 사용됐다. 마침내 도를 깨우쳤다는 뜻인 구년면벽(九年面壁) 역시 최상의 경지를 상징하는 ‘9’ 의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9’를 지평선이라 불렀다. 9는 처음 아홉 개의 수들이 끝없는 순환을 통해 반복되면서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극한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스어로 엔네아드(Ennead)라 불리는 ‘9’가 한자리 수로는 가장 큰 수로서 완성, 중심, 전체성을 상징하는 이유다. 중국에서도 ‘9’는 완벽을 상징하는 3이 제곱된 가장 길한 숫자로 하늘의 힘을 나타내는 천상계의 숫자로 간주했다. 이처럼 ‘9’는 최상의 경지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숫자 ‘9’는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경지를 의미하는 동시에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9’는 완성을 위한 ‘새로운 시작’의 의미도 담고 있다.
많은 언어에서 ‘새롭다’는 단어가 ‘9’를 나타내는 산스크리티어 나바(nava)로부터, 그리고 나중에 라틴어 노바(nova)로부터 유래했다. 9월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 ‘neun’을 비롯한 9를 의미하는 단어들이 ‘새롭다(neu)’를 뜻하는 단어와 형태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이 주목되고 있다. ‘9’를 뜻하는 이집트 상형문자는 일출을 나타내는 글자의 일부라고 한다. 이처럼 ‘9’와 ‘새로운 것’이 서로 관련되는
것은 바로 ‘9’와 함께 하나의 새로운 영역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자모체계에서 ‘Teth’는 아홉 번째 문자라 숫자로서 ‘9‘라는 가치를 부여받는다. 혹설에 의하면 ‘Teth’는 생명의 맹아가 싹트는 여성의 신체기관인 자궁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생명이 9개월 동안의 수태기간 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것처럼, ‘9’가 완성을 위한 새로운 시작의 의미도 가지게 되는 셈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을 1월이나 3월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해의 다짐이 작심삼일이 되고 나면 쉽게 포기한다. 새로운 목표 없이 일상에 지쳐 하루, 일주일, 한 달을 무심코 보내기 일쑤다. 삶에 치인다는 핑계로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는 것에조차 둔감해 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한 해를 지내다보면 다시금 지쳐가는 마음을 추슬러 새롭게 도전하는 변화가 있어야한다.
이제,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조금씩 물러간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가을기운도 느낄 수 도 있다. 가을의 문턱에 서 있긴 하지만 아직 더위가 남아 있는, 이른바 잔서지절이다.
9월은 숫자 ‘9’의 의미처럼 완성을 위한 새로운 시작의 절기다. 여름 늦더위가 열매들에게 무르익을 기회인 것처럼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에게도 한 해의 완성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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