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물의 인간들은 대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어떤 가치를 향해 돌진해 삶을 바쳐버린다. 이때 그들의 무술은 ‘나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대의 그 자체이며, 대의를 위해 사는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장르 속 인간들의 결합과 해체, 화합과 갈등은 결국 인물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의 교집합을 형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고, 이것이 무협물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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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그친다면, 무협물은 크게 흥미로울 게 없다. 입체적이지 않은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드라마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무협극에 생명력이 주입되는 순간은 ‘대의의 교집합’ 자체를 무마하는 또 다른 어떤 것이 ‘의미를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에 끼어들 때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우정일 수도, 욕망일 수도 있다. 계획에 없던 ‘감정’이 삶을 흔들어 놓을 때 그들의 고뇌와 선택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진짜 무협물이며 이 비장함과 애절함 때문에 우리는 무협물에 매혹된다.
이런 의미에서 ‘협녀, 칼의 기억’(감독 박흥식)은 ‘좋은’ 무협물의 조건을 갖춰 놓고 시작하는 작품이다. 대의를 이행하는 집단, 욕망에 휩싸여 대의를 잊은 개인, 죄책감에 세상을 져버린 여자, 아버지를 위해 복수를 꿈꾸는 소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잊지 못한 남녀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무술이 있다. 이 요소가 하나의 작품이 됐을 때 그것은 ‘좋은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동시에 박흥식 감독이 ‘협녀, 칼의 기억’으로 보여주려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편의 영화’는 준비물만으로 저절로 만들어질 수 없다. ‘협녀, 칼의 기억’은 성공하지 못한 무협영화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이 작품에는 뼈대만 있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 풍천·덕기·설랑, 풍진삼협은 민란을 일으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선다. 그들의 꿈이 눈앞에 들어온 순간, 덕기의 배신으로 이들의 대의는 물거품이 된다. 풍천은 죽고, 설랑은 자취를 감춘다. 덕기는 배신을 발판 삼아 고려의 권력자가 된다. 18년 뒤 설랑과 덕기, 풍천의 딸 홍이는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협녀, 칼의 기억’이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극의 힘, 그러니까 서사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협녀, 칼의 기억’에는 줄거리만 있고, 이야기는 없다. 영화는 에피소드들을 나열해 마지막 장면을 향해 도달하는 것만이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협녀, 칼의 기억’은 괜찮은 무협극이 될 수 있는 요소를 잘 갖춰놓고 시작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요소들을 일관된 하나의 주제로 엮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명도 충실히 하지 않는다(설명을 간략하게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아무도 못 알아듣게 하는 것은 다르다). 이렇게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는 건 뜬구름 잡는 대사들이다. ‘왜’와 ‘어떻게’가 모두 빠져버리니 영화가 원래 도달하려 했던 길이 어디인지도 보이지 않고, 이 영화가 종국에 도착한 곳이 맞는지도 알 수 없게 돼버렸다(편집 또한 효과적이라고 볼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과거 풍진삼협이 가졌던 대의도, 덕기와 설랑의 사랑도, 덕기의 욕망도, 설랑의 죄책감도, 홍이의 복수심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하는 돌이킬 수 없는 그들의 운명도 좀처럼 관객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그들끼리만 비장하고, 그들끼리만 슬프고, 그들끼리만 애절하다. 앙상한 서사와 같은 말은 감동의 부재다.
이병헌, 전도연은 국내 최고 배우들이지만 두 사람도 침몰한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데 실패했다.두 배우의 열연이 평범해 보이는 건 실로 오래간만이다.
좋지 않은 건 액션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무협영화가 의무적으로 보여줘야 할 액션의 양을 채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액션 장면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질적인 문제도 안고 있다. ‘협녀, 칼의 기억’이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액션은 경공술이다. 우아한 모습으로 하늘을 걷는 듯한 이 무술을 ‘협녀, 칼의 기억’은 단순 ‘비행(飛行)’으로 만들고 말았다. 관객은 이미 킹후 감독의 1969년 작 ‘협녀’와 이 영화의 액션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리안 감독의 2000년 작 ‘와호장룡’에서 경공술 액션의 최대치를 감상했다. ‘협녀, 칼의 기억’의 경공술 액션은 이에 비하면 부족한 부분이 많다.
각 캐릭터의 성격에 맞는 액션을 관객이 알아볼 수 있게 구현해내지 못해 각기 다른 무술이 충돌할 때의 쾌감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또 ‘와호장룡’(2000) ‘영웅:천하의 시작’(2002) ‘일대종사’(감독 왕자웨이) 등 중국무협영화의 특정 장면을 너무 자주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이 영화의 액션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게 한다.
이병헌과 전도연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에서 ‘협녀, 칼의 기억’에 거는 관객의 기대가 클 것이다.
연기력과 스타성 두 부분에서 모두 최고 수준인 남녀 배우의 두 번째 만남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두 배우가 다른 작품에서 다시 한 번 함께 연기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 이병헌은 현재 국내 배우 중 가장 흥미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연기자다. 사생활과는 별개로 그의 연기를 따라가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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