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영화 ‘베테랑’(감독 류승완)은 말 그대로 유쾌한 영화다. 류승완 감독은 123분의 러닝타임을 흥겨운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마치 탄산이 들어있는 듯한 이 에너지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적절한 완급 조절의 연출력을 만나 스크린 밖으로 분출한다. 멘토스와 코카콜라랄까.
류승완 감독은 전작 두 편(‘베를린’ ‘부당거래’)에서 칼을 갈았다. 그 칼을 관객을 향해 매섭게 겨눴다. 하지만 ‘베테랑’에서는 겨누는 대신 칼춤을 춘다. 이 춤에는 ‘한(恨)’이 아닌 ‘흥(興)’이 있다. ‘베를린’과 ‘부당거래’를 지배했던 게 세계를 향한 한의 정서였다면, ‘베테랑’의 공기는 흥이다. 아마도 ‘베테랑’은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영화(장편극영화 9편) 중 관람하기에도 가장 즐거운 작품일 것이다.
광역수사대 형사 서도철은 재벌 3세 조태오의 악행을 알게 된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도철은 조태오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집요한 추적 끝에 서도철은 조태오를 잡는 데 성공한다.
‘정의로운 형사가 부패한 권력자를 타도한다’는 ‘베테랑’의 스토리는 익숙하다. 그리고 단순하다. 형사물이 변한 건 이 익숙함과 단순함의 반복에 관객이 지쳤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우리 영화계는 언젠가부터 이 안정적인 포맷을 버리고, 형사스릴러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유형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관객은 사이코패스에 지쳤다. ‘베테랑’은 때마침 찾아온 ‘클래식한 형사물’이다. 그 익숙함과 단순함이 오히려 관객을 쉽게 영화로 끌어들인다. ‘베테랑’에는 우리가 예전에 형사물을 보면서 그랬듯 주인공을 응원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
‘베테랑’이 이 장르의 전형성을 만회하기 위해 쓴 첫 번째 카드는 바로 ‘속도 조절’이다. 앞서 이 영화를 두고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테랑’이 러닝타임 내내 전력질주하는 영화는 아니다. 류승완 감독의 전략은 ‘롤러코스터’. 단순히 짜릿함과 동의어로 자주 쓰이는 이 단어는 ‘베테랑’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베테랑’은 처음부터 쌩하고 내달렸다가(중고차 시퀀스) 더 큰 속도를 얻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서도철의 조태오 조사 시작), 높은 곳으로 천천히 올라간 뒤에는 좌우로 뒤집히며(서도철과 조태오와 대립 격화), 쏜살같이 달려가 360도 회전을 두 바퀴 돈 뒤(서도철과 조태오의 마지막 액션 시퀀스) 멈춰선다. 류승완 감독은 이 일련의 과정을 적절한 러닝타임의 분배를 통해 통제함으로써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베테랑’은 진짜 롤러코스터 같은 영화다.
여기에 간결하고 재빠른 생활밀착형 액션을 더하고(정두홍과 류승완의 케미스트리), 타율 높은 유머를 곁들이고(슬랩스틱과 말장난 모두), 입에 착착 감기는 대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쪽팔리게 살지 말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했다.
출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은 류승완 감독의 복안을 현실화해 준다. 그 중심에는 역시 황정민이 있다. ‘부당거래’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형사 ‘최철기’가 뱀 같은 인물이었다면, ‘베테랑’의 형사 ‘서도철’은 코뿔소 같은 인물. 이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황정민은 이전보다 한 톤 올라간 목소리와 명료한 표정, 조금은 과장된 듯한 몸짓으로 ‘베테랑’의 분위기를 형성해낸다. 함께 호흡을 맞춘 오달수의 연기 역시 뛰어나다. ‘암살’에서도 그랬듯이 그는 상대 배우를 더 빛나게 해주는 배우다. 상대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타이밍, 대사의 완급조절을 통해 극의 리듬감을 만들어 내는 오달수의 연기는 그가 왜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는지 다시 한 번 알려준다.
유아인의 연기도 나무랄 데 없다. 전형적인 악인인 조태오는 유아인을 만나 부분적으로 신선한 인물이 됐다. 이는 분명 그가 타고난 배우의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얼굴을 잘 사용하는 건 유아인의 영민함 덕분이다. 유아인은 캐릭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할 줄 안다. 유해진은 코미디 연기와 함께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종류의 연기를 보여준다.
5년 전 류승완 감독이 내놓은 ‘부당거래’는 ‘베테랑’의 대척점에 선 영화다. ‘부당거래’가 세상을 향한 비관이 짙게 드리운 작품이었다면, ‘베테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인간을 긍정하는 영화다. 이제 류승완 감독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두 영화를 놓고 자신의 최고작이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게 됐다. 이쯤 되면 류승완에게 제2의 전성기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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