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지지율에 목을 맨다. 지지율은 정치인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바이털 사인이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자리가 안겨주는 권력과 권위도 같이 하락한다. 자칫하면 정치생명 자체가 끝나 버린다. 그래서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불사한다. 폴(poll), 즉 지지율 조사결과에 살고 죽는다고 해 ‘폴생폴사’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정치전문가들이 가장 불가사의하게 여기고 있는 정치 현상 가운데 하나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다. 지금 러시아는 경제를 지탱해 온 유가가 하락하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다. 한 TV프로그램에 나온 러시아 노인은 이렇게 푸념한다. “소비에트 연방시대가 훨씬 좋았다.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훨씬 좋겠지만 우리는 아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있었다.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지금은 우유도 없고 푸성귀로 연명해야 하는 실정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와 곤고한 현실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 절절이 배어난다. 이렇듯 어려운 경제 현실 속에 지난 2월에는 야권 지도자 넴초프가 암살당하는 뒤숭숭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쯤 되면 국가 지도자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도 대통령 푸틴의 지지율은 80% 내외를 넘나들며 고공 행진중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치인들, 그리고 국가 지도자에 대한 지지율은 업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라기보다는 단지 국민들의 그때그때 심리상태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안 좋은데도 지지율은 오히려 오르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구 소련 정보국 출신인 푸틴은 심리조작에 아주 능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 국민들의 저변에 불안심리가 자리 잡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국민들은 가부장적 지도자를 갈구한다는 것을 꿰뚫고 있다. 러시아 TV들은 푸틴이 웃통을 벗은 채 말을 타거나 시베리아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는 모습 등을 자주 내보낸다. 강력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한 것이다. 서방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런 이미지 조작도 지속되다보면 국민들에게 먹힌다.
여기에 더해지는 고전적 수법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인들의 일그러진 민족주의를 자극했으며 이것은 푸틴 지지율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권력의 퇴행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올리는 데 요긴한 수단이 되곤 한다. 그래서 많은 권력들이 이런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대한민국은 퇴행의 연속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항쟁과 희생을 통해 회복했던 민주적 가치들은 급속히 무너지고 손상됐으며 시스템의 퇴행도 두드러졌다. 이념은 권력의 만능도구가 됐으며 국가기관들은 본분을 잊은 채 권력의 의중과 심기를 헤아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잇달아 터져 나온 재난들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의 무능은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퇴행의 유혹은 이 지점에서 한층 더 강렬해진다. 권력은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시키는데 집중하게 되고 이를 위한 무리수를 서슴지 않게 된다.
얼마 전 대통령은 집권당 원내대표를 쫓아냈다. 민주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횡포였다. 그런데도 한 TV방송은 “대통령이 모처럼 존재감을 보여줬다”며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아직도 대통령을 절대군주쯤으로 착각하는 퇴행적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지지율은 반짝 급등했다.
현 권력 지지층의 상당수는 자신들이 주역이었던 시절에 강한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념몰이와 애국코드로 대표되는 대통령의 1970년대 식 행태는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한다.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들의 일탈이 반복되는 것은 이런 지지층의 두둔과, 사안의 ‘물 타기’를 도와주는 퇴행 언론들이 있기 때문이다.
퇴행적 지지율에 기대는 것이 당장은 정치적 실익이 될지 몰라도 길게 보면 권력과 국가 모두에 불행한 일이다. 그것이 80%가 됐든 35%가 됐든 마찬가지다. 이런 유혹에 빠지는 것은 현재의 권력만 생각하고 국가의 미래와 역사는 헤아리지 못하는 미성숙의 징표다. ‘폴생폴사’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는 자칫 길을 잃게 된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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