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이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환경파괴와 온난화 등으로 오랜 세월 지속돼 온 기상패턴이 깨지면서 곳곳에서 이상 현상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올해 수십년만의 극심한 가뭄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지난 주말 상륙한 태풍으로 일부 지역 해갈은 됐지만 가뭄으로 인한 피해는 여전하다.
그런데 타는 가뭄 속에서도 4대강 보 주변의 양수장은 물이 찰랑찰랑 넘쳐흘렀다. 그러자 4대강 사업을 밀어붙였던 관계자들은 “사업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양수장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의 논과 밭들은 지속된 가뭄을 견디지 못해 갈라지고 타들어갔다. 물이 있으면 무엇 하는가. 서로를 연결해 주는 물길이 전혀 없는 것을. 그런데도 가뭄 해소에 도움이 되는 4대강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이고 궤변일 뿐이다.
한쪽은 물이 남아도는데 다른 곳에서는 단 몇 방울의 물이 아쉬워 아우성들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두 개의 풍경은 마치 작금의 경제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한국의 경우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 운운하고 나라 전체는 돈이 넘쳐 나는 것 같은 데 정작 모두들 돈이 없고 먹고 살기 힘들다고 죽는 소리다. 미국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그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경제학자 로버트 리이시는 “대부분의 돈이 저 꼭대기로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간명하게 진단한다. 돈은 넘쳐날지 몰라도 거의 모두가 잘 사는 사람들 주머니로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때는 위로 올라간 부자들 돈이 밑으로 흘러 내려 모두를 살찌우게 한다는 ‘낙수이론’이 설득력과 공감을 얻은 적이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최근 IMF는 ‘소득 불균형의 원인과 결과’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낙수효과는 근거 없음이 밝혀졌다”고 선언했다. 5명의 경제학자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150개국 사례를 분석한 결과 상위계층의 소득이 더 증가할 때마다 성장률은 떨어지고 하위계층 소득이 늘어날 때마다 성장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낙수이론에 대해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렸다.
‘낙수이론’을 떠받쳐온 세력 가운데 하나인 IMF가 뒤늦게나마 이런 선언을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많은 의식 있는 경제학자들과 지식인들이 낙수이론의 허구성을 지적해 왔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교황은 “어떤 사람들은 낙수이론을 옹호한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선함이나 기존 경제체제의 성스러운 작동을 순진하게 믿는다는 표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교황도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경제적 힘을 가진 세력과 경제체제는 선하지도 이타적이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돈이 위로부터 밑으로 흐르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기대일 뿐이다. 인위적으로 수로를 내주지 않으면 물은 그냥 한쪽에 고여 있을 뿐이다. 마치 가뭄 속 두 풍경처럼 말이다.
몇 개월 전 한국의 실세 경제장관이 ‘소득이 주도하는 성장’을 언급해 분배에도 신경 쓰겠다는 것인가라는 기대감을 안겨줬지만 너무 찔끔 오른 최저임금은 이런 기대가 헛된 것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최저임금이 450원 올랐다는 뉴스를 들으며 떠올린 것은 갈라진 논에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던 박근혜 대통령의 퍼포먼스 사진이었다. 최저임금 협상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진정한 의지라곤 찾아보기 힘든, 단지 보여주기 위한 절차였을 뿐이다.
현재의 권력인 수구보수에게서 느끼는 건 절망뿐이지만 미래의 권력이 될지도 모를 개혁적 보수에게서는 일말의 희망을 본다. 박 대통령과의 불화로 물러난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사임하면서 “욕을 먹어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라며 성장과 복지의 균형, 그리고 ‘중부담-중복지’ 모델을 계속 추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고대사회에서 군주에게 가장 요구되는 능력은 물을 잘 다스리는 것, 곧 ‘치수’였다. 좋은 정치의 본질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물의 생명력은 흐름에 있다. 물이 고이지 않도록 물꼬를 트고 흐르도록 만들어 땅을 고루고루 적셔주는 것이 모두의 상생을 위한 좋은 정치이다. 태평양 어느 쪽에서든 좋으니 이젠 이런 정치를 한 번쯤은 보고 싶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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