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IN - ② 바르셀로나】
가우디 얘기는 정말 안 하거나 짧게 줄이고 싶었다. 바르셀로나에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우디 이야기만 하니 말이다. 그런데 역시나 불가능하다. 가우디를 빼고는 바르셀로나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74세에 전차사고로 죽을 때까지 평생 이곳에서 살며 성가족 대성당(Sagrada Familia)을 비롯한 10여개의 가장 독특하고 기막힌 건축물을 남겼다. 그 중 7개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돼 있으니 얼마나 특별한 건축가인지 알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의 건축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고 경외의 대상이 되어 한해 300만명이 찾는 명소가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바르셀로나라는 도시 자체가 1992년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한 곳이니, 그 전에는 가우디와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스페인 내에서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항상 직선으로 생긴 건물들만 보아온 현대인들이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직접 보았을 때 느끼는 그 시각적 충격은 말로 할 수 없다. 직선을 벗어난 건축물이라면 파리의 아르누보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나 비엔나의 자연주의건축가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의 것들도 있지만 가우디의 건축은 형태와 구조면에서 비교가 안 될만큼 인간의 상상력과 기술력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탄생의 문’ 파사드 앞에 섰을 때, 그 문을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무를 형상화한 기둥들 사이에 서서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을 온 몸 가득 받았을 때, 이것은 인간의 건축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가우디는 천국을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수도자 건축가’로 불리는 가우디는 근대 건축사에서 어떤 사조나 시대 흐름과 연관되지 않은 독특한 인물로, 나무 하늘 구름 식물 곤충 등 자연에서 찾아낸 자신만의 건축언어로 집을 지었다. 그가 지은 건축물에 들어서면 현대건물에서 느껴지는 차가움과 거만함 대신 생명체인 자연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편안함이 전해져 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끝없이 환상적이면서 신비한 그의 건축은 놀랄 만큼 정확한 구조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어 더 경이롭고, 거기에 도자기와 타일 모자이크로 동화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어 더욱 사랑스럽다.
가우디가 1882년 짓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44년간 모든 공력을 쏟아부은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으로, 큰 입구인 파사드가 3개,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첨탑,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탑 등으로 구성돼 있다. 3개의 파사드는 탄생의 문, 수난의 문, 영광의 문으로 구분돼 있고 각기 특별한 조각품과 벽화로 성경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품 앞에 서면 표현할 말을 잊게 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 자신이 완공에 200년이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현대에 와서 새로운 기법을 사용, 가우디 100주기인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정부나 교회의 지원은 일체 없이 후원자들의 기부금과 관광객 입장료 수입 위주의 순수한 민간 자본만으로 짓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이외에도 구엘공원과 저택,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 카사 빈센스 등 10여개의 가우디 건축물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하나같이 그 독창적인 형태와 구조에 놀라게된다. 가우디와 건축에 관해서는 너무 할 말이 많지만 이미 수많은 정보가 나와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 해도 되겠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가우디 다음으로 꼭 방문하게 되는 곳이 차로 한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가톨릭 성지 몬세라트 수도원(Monserrat Monastery)과 성당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산 절벽 바로 밑에 지어진 몬세라트 수도원은 1,000년 넘게 종교적 성지로 지켜져 왔는데 1811년 프랑스 침공 때 모두 파괴되고 현재의 건물은 그 이후 재건된 것이다.
몬세라트 수도원이 성지가 된 이유는 ‘라 모레네타’라는 검은 성모상(Black Madonna) 때문이다. 9세기께 발견된 이 성모상은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방의 수호 성모로 추대돼 왕관이 씌워졌으며, 나무에 칠한 광이 오랜 세월 촛불의 그을음으로 검게 변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도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만지는 탓에 지금은 유리관을 씌워 보호하고 있는데, 성모가 한손에 들고있는 둥근 구슬을 만지며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 구슬만 유리 밖으로 내놓아 사람들이 만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몬세라트에서 정말 좋았던 것은 이 성모상이 아니라 에스콜라니아 소년합창단(L’Escolania de Montserrat)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800년 전통의 이 합창단은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9~14세 소년들로 구성돼 있으며 하루 한 번 미사 때 천상의 노래를 들려준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다고 하는데 실제로 얼마나 소리가 아름답던지 완전히 넋을 놓고 감상했다. 2년 전 비엔나에 갔을 때 빈 소년합창단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이 외에도 피카소 뮤지엄과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을 방문했다. 스페인 태생인 피카소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소년과 청년기를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다. 그는 조국이 프랑코 독재 하에 놓이자 스페인에 돌아오기를 거부했으며, 이 미술관은 1963년 친구이며 비서였던 사바르테스가 유서 깊은 중세 저택들을 개조하여 건립했다. 오픈 당시에는 사바르테스의 소장품이 컬렉션의 기초가 되었고, 후에 살바도르 달리 부부가 갖고 있던 피카소 작품들을 기증했으며, 사바르테스 사후에 피카소가 921점의 작품을 기증,오늘의 미술관을 이루게 됐다.
피카소 뮤지엄이 재미있는 것은 큐비즘의 대표작가의 미술관임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의 큐비즘 회화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 초기 시절의 자화상들과 인물화, 풍경화들과 함께 인생 끝 무렵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재해석해서 그린 수많은 그림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입체파 시기의 중요한 그림들과 그의 생애 역작인 ‘게르니카’는 나중에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왕립미술관에서 실컷 볼 수 있었으니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었다.
<글·사진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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