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주홍, 노랑, 초록…. 무지개 깃발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의 합헌성을 인정한 2015년 상반기 끝자락의 시점. 미 전역에서 펼쳐진 풍경이다“역사는 때로 무서운 속도로 달린다. 2015년 6월 마지막 한 주가 그렇다. 역사가 이처럼 과속을 낸 경우는 지난 239년 미국역사에서 일찍이 찾을 수 없다.” 워싱턴포스트의 지적이다.
온통 무지개 색이다. 백악관은 물론이고 ‘코퍼리트 USA‘도 무지개 찬가 일색이다. 마치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동성결혼 합헌 대법판결이 나오자 아메리카 에어라인에서 갭(GAP), 위버캔디에 이르기까지 주류 기업들은 다투어가며 로고에 무지개 색을 덧입히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도취된 것인가. 해마다 독립기념일이면 밤하늘에 펼쳐지는 불꽃놀이, 그 불꽃도 무지개 색으로 비쳐질 정도다.
함성이 진동한다. ‘We shall overcome’이 아니다. ‘We have overcome’의 함성이다. 그러나 그 뒤로 다른 멜로디의 노래가 들려온다. 서러움이 응축돼 있다고 할까. 그런 슬픈 노래다.
‘우리 아직 미국에 살고 있는 것 맞아?’-. ‘5 대 4’- 대법원 평결이 상징하듯이 절반에 가까운 미국인들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주류로 불렸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전 세대적인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당혹감 가운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미국의 기독교계에 던져진 충격파는 더 심각하다. 그렇지 않아도 교인 수는 해마다 줄고 있다. 밀레니엄세대로 불리는 젊은 층은 교회를 멀리한다. 가치관 영역에서도 점차 영향력을 잃고 있다. 미국문화는 정통 기독교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크리스천은 점차 사회적으로 ‘왕따’ 취급을 당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계가 맞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정황에서 대법원은 정통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는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교회에 결정적인 몸통 공격을 가한 꼴이다.” 뉴욕타임스 진단이다.
보이지 않는 박해가 가중될 것이다. 공적 무대에서 교회는 침묵을 강요당하고 결국 사적 영역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벌써부터 일부 주류 언론사들은 동성결혼반대 원고는 싣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게 시작으로 교회의 목소리는 모든 뉴스 채널에서 사라지는 날이 곧 닥치게 된다.
그 뿐이 아니다. 소송러시 속에 교회는 그동안의 기득권을 모두 잃을 것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교회가 맞게 될 상황에 대한 우려다. 그러면 분노와 당혹, 좌절과 슬픔만이 기독교계가 보이고 있는 반응의 전부인가.
“그렇다고 하늘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딛고 있는 땅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타임지에 실린 한 기독교변증론자의 주장이다.
“대법원 판결을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에 다시 초점을 맞추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복음의 본질과는 별 관계가 없는 문화전쟁에 지나치게 경도해왔다. 그런 자성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본질 회복 운동의 필요성이 복음주의 교계 중심으로 새삼스레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반응도 비슷하다. 상황은 계속 안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 일종의 이데올로기화 된 세속주의의 공격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미국에서의 종교 갈등은 과거 다른 종단과의 갈등과는 양상이 전혀 다른 ‘교회와 국가 세속주의 대결’로 변질 된다는 시각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나. 미국은 포스트-크리스천 국가가 됐다는 사실이다. 미국 사회를 지탱해주던 기독교 가치관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 비(非) 기독교화, 혹은 탈(脫)기독교화가 미국 사회의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것이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이다. 로마제국이 붕괴했다. 이와 함께 찾아든 게 야만의 암흑시대다. 그 때는 A.D. 500년께. 훗날 베네딕트로만 알려진 한 젊은 수사가 수도원운동을 펼쳤다. 그 운동을 통해 유럽문명은 다시 생명을 얻고 소생했다. 이와 흡사한 운동의 필요성이 새삼스레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 필요성을 뉴욕타임스의 데이빗 브룩스도 제창하고 나섰다. 문화전쟁에서 전략적 후퇴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커뮤니티는 스스로 주변의 암흑을 비쳐줄 신앙의 촛불을 쳐들 때가 됐다는 주문을 하고 나선 것이다.
상당히 과격하게 들린다. 그러나 뒤집어 해석하면 그 만큼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국가세속주의의 전 방위 공격에 그러면 미국의 교회는 결국 주저앉고 말 것인가.
기독교는 박해 속에 자란다.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역전, 반전의 종교가 기독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 판결은 오히려 뭔가 대각성의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 본질의 회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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