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이 민낯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물론 그 수준은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후진적인 것이었다.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에 삼권분립을 저해하는 위헌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권을 행사했다. 거부권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국회는 다시 표결해 최종 입법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삼권분립을 들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집권당과 입법부를 향해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내용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국무회의 발언을 통해 입법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섭섭함의 표현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특히 새누리당 원내총무와 여당의 책임을 따져 묻는 대목에서는 ‘구태정치’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 ‘국민들이 심판해야 한다’는 등 감정적 어휘들을 사용하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대통령이 입법부에 대해 자기 입장을 표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금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마치 자신이 절대군주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행정부 수반의 인식도 문제지만 이에 대해 보이는 집권당 국회의원들의 반응은 더 한심하다. 대통령이 진노하자 새누리당 지도부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원내대표는 대통령에게 사과하고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은 폐기시키기로 결정했다. 스스로 독립성을 가진 존재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원내대표가 허리를 90도 조아려 사과하는 모습은 삼권분립의 실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광경이었다.
국회의원들을 자신이 부리는 수하 정도로 여기는 대통령, 그리고 이런 대통령의 반민주적 인식에 끌려 다니는 집권당 의원들. 이들에게 삼권분립은 소중히 지켜야 할 현재의 가치가 아니라 교과서에나 수록돼 있는 낡은 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무역협상촉진권한’(TPA) 부여안이 지난 12일 연방하원에서 부결됐다. 민주당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표결 몇 시간 전 하원을 직접 방문해 자신의 정당인 민주당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만약 오바마가 민주당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박 대통령 식으로 감정을 드러냈다면(한국이었다면 반대표 자체가 나오지도 않았겠지만) 웃음거리가 됐을 것이다.
또 지난주 연방대법원은 오바마케어, 그리고 동성결혼과 관련한 역사적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현 연방대법원은 보수적 성향이 우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주 이들이 내린 판결은 전혀 보수적이지 않았다. 이것이 삼권분립이요 민주주의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보여 온 행태를 보면 과연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와 삼권분립을 제대로 이해나 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은 이전에도 입법부와 검찰을 향해 가이드라인성 발언들을 반복해 왔다.
또 자신이 비판하는 모든 잘못된 행위의 적용 대상에서 자신만은 예외라는 듯 처신해 왔다. ‘남이 하면 스캔들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이중기준의 전형이 박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 이번에 거부권을 행사한 국회법 개정안과 같은 내용의 법안을 공동발의하는 등 적극 지지했었다. 이런 자기모순 사례는 한 둘이 아니다.
하지만 ‘배신의 정치’ 운운하며 여당 원내총무를 압박한 부분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정치인이 욕먹어야 할 가장 큰 배신은 유권자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그는 ‘국민의 행복’ ‘100%의 대한민국’ 같은 추상적 공약들은 물론 구체적 수치로 제시했던 공약들까지 손바닥 뒤집듯 버린 바 있다. 이런 걸 ‘배신의 정치’라 하지 않는다면 정치인에게 배신이라 낙인찍을 만한 행위는 없다.
‘이중기준’의 다른 이름은 ‘기만’이다. 만약 박대통령이 자신의 과거 말과 행동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면서 자기모순적인 언행을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상대에 대한 기만이다. 그렇지 않고 마음속에서 망각의 기제를 작동시켜 이런 언행을 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신에 대한 기만이다. 삼권분립을 해치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은 삼권분립의 수호자인양 행세하는 대통령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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