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창흠(논설위원)
지난주 비가 내렸다. 며칠 온 덕에 텃밭 채소들이 쑥쑥 자란다. 풋 배추 잎사귀는 활짝 나래를 폈다. 열무는 키가 다 컸다. 깻잎은 몸집을 불리며 다닥다닥 붙어있다. 솎아낼 판이다. 오이와 호박은 줄기를 쭉 내밀었다. 미나리는 짙은 녹색으로 변했다. 부추와 파는 고개를 바짝 처 들었다. 모종이 늦은 고추도 뿌리를 내렸다. 작은 키에 하얀 꽃이 피었다. 애벌레만한 고추도 달렸다. 토마토는 며칠 새 한 자나 컸다. 민들레도 또 다시 솟아났다. 모종한 적치마 상추가 훌쩍 자랐다. 파종한 녹색상추도 옹기종기 모였다. 따먹을 정도다.
요즘 우리 집 식탁은 온통 풀밭이다. 끼니마다 풋 배추, 어린깻잎, 민들레, 미나리, 파와 부추, 상추 등이 등장한다. 커다란 소쿠리에 소복하게 담겨 있다. 텃밭을 옮겨 놓은 것 같다. 그래서 매끼니 쌈밥이다. 마늘과 고추가 섞인 쌈장과 찬밥은 필수. 삼겹살은 기본 메뉴. 시원한 막걸리와 소맥은 옵션이다. 다행히 질리지 않는다. 채소마다 독특한 맛과 향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쌈 싸먹기를 좋아한다. 예전부터 상추, 호박잎, 배춧잎, 깻잎, 곰치, 민들레, 쑥갓, 콩잎, 뽕잎, 미나리 등으로 쌈을 싸 먹었다. 요즘은 겨자잎, 청경채, 뉴그린, 케일, 치커리, 비트잎, 적근대, 셀러리, 신선초 등의 야채도 쌈 재료로 쓰인다. 영조 때 실학자 이익의 말처럼 채소 중 잎이 큰 것은 모두 쌈을 싸 먹을 정도다. 채소뿐 아니다. 김과 미역, 다시마 같은 해초도 쌈의 재료로 빠지지 않는다. 참으로 우리의 ‘쌈 싸먹기’는 유별난 편이다.
그 중에서도 상추쌈을 가장 많이 즐긴다. 쌈 채소로 상추가 최고다. 텃밭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상추면 단연으뜸이다. 텃밭에서 막 따온 상추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야 한다. 상추쌈은 맨손으로 싸 먹어야 제 맛이다. 왼손에 상추 몇 겹 포개 찬밥한술 얹고 쌈장 발라 한 보따리 입에 가득 넣는다. 아삭아삭 씹어 먹는다.
상추의 쓴맛 단맛에 쌈장의 맵고 떫은 맛 더하니 맛이 일품이다. 삼겹살을 구워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상추를 곁들이면 느끼한 맛은 사라진다. 상큼한 맛이 살아난다. 맛의 황홀감이다. 참을 수 없는 맛의 유혹이다. 삼겹살과 상추는 찰떡궁합이다. 역시 상추쌈이 제일이다. “눈칫밥 먹는 주제에 상추쌈까지 먹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게 상추다. 상추는 황달, 빈혈, 신경과민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해독성분이 뛰어나 숙취해소와 피도 맑게 해준다.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하다. 갱년기 이후 여성의 골다공증 예방에 효과적인 이유다. 이외에도 상추의 효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옛날부터 상추는 천금을 주고 씨앗을 샀다고 해서 ‘천금채’로 불렸다. ‘은근초’란 속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상추가 남자의 정력에 좋다고 해서 상추를 많이 심으면 그 집 마님의 음욕을 간접으로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상추를 서 마지기 반이나 하는 년!”이라 하면 음욕이 대단한 여자라는 욕이었다. 상추는 남이 절대로 보지 못하도록 숨겨서 가꾸어 먹는 희귀한 정력 소채였기에 은근초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가 옛날 여인들은 고추밭의 이랑 사이에 심은 상추는 서방님 밥상에만 은근히 올렸다. 아마도 고추와 상추의 기운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켜 특별한 작용을 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옛날사람들은 상추가 정력에 좋다고 믿었다. 상추의 효능을 적은 옛날 의학서에는 상추가 정력에 좋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 있다. 당나라 때 손사막이 쓴 ‘천금식치’에는 상추가 정력을 더해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초강목은 상추는 산모의 젖이 많이 나오게 할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신(腎), 곧 정력에 좋다고 했다. ‘동의보감’도 맛이 쓰고 성질이 차갑지만 오장을 편하게 하여 사람에게 이롭다고 했다. 고대 이집트신화에는 상추를 생식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삼았다.
상추가 정력에 좋다는 믿음은 동서양이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상추는 음력으로 4월과 5월이 제철이라고 한다. 요즘처럼 더위가 시작하는 늦은 봄 점심상에 딱 어울리는 메뉴가 상추다. 지금 상추가 제 맛이다. 그래서 상추쌈이 더욱 맛있어 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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