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절망의 벼랑 끝에 설 때가 있다.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음을 택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결국 우리는 살아낸다. 그렇게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며칠 전 라디오에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들었다. 라디오 서울의 ‘좋은 아침 좋은 하루’는 5월 가정의 달 특집으로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 공모를 했다. 어바인에 사는 데이빗 권씨가 쌍둥이 남매에게 쓴 편지가 소개되었다.
13년 전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기들을 태우고 집으로 갈 때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면 참외만하던 너희 둘이 혹시나 카시트에서 떼굴떼굴 굴러 떨어질 까봐 설설 기어서 집에 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로 편지는 시작되었다.
편지에는 우선 아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었다. “오현아, 넌 어쩜 내가 말한 대로 그대로 태어났니. 논리적인 엔지니어 아빠와 감성적이고 사교성 좋은 엄마를 반반 닮았으면 했는데 넌 딱 그대로 엄마 아빠의 좋은 점만 받고 태어났구나. …”중학생이 되어 PG-13 영화를 같이 보러 다니고 아빠가 장보러 갈 때면 “You go I go. You die I die!”라는 영화대사를 흉내내며 따라나서는 아들 재미에 그는 푹 빠진 것 같았다. 그리고는 “난 크면 아빠 같은 남자가 될 거야”라는 아들의 말에 권씨는 여느 아빠처럼 흐뭇해했다.
그런데 그는 ‘여느’ 아빠가 아니었다. 26년 전 교통사고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휠체어를 타는 전신마비 아빠를 아들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빠로 자랑스러워하는 데 대해 그는 고맙고 또 고맙다.
편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에게로 이어졌다. 갓난 딸이 너무 예뻐서 그는 “크지 말고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빠 말을 진짜 잘 듣는 딸이어서 그런가? 우리 하은이는 지금 13살이 다 되어가는 데도 아직도 그대로 있구나. 베이비처럼 걷지도 기어 다니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그저 침대에서 방실방실 웃고만 있으니 말이다.”백일쯤 되었을 때 딸의 뇌에서 이상이 발견되었다. 그후 수많은 의사들을 만나고 온갖 검사를 거쳤지만 원인도 치료방법도 찾지 못했다. 지난 세월 그는 얼마나 많이 울고 얼마나 많이 기도드렸는지 모른다.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른 시각으로 딸을 보게 되었다. 아무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딸은 그대로 편안해 보였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아빠, 나 지금 행복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넌 그렇게 늘 얼굴에 웃음 가득하고 행복해하는데 왜 아빠는 네가 건강해져서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가고 숙제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 건지 …” 싶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활짝 웃으며 눈을 맞춰 주는 딸의 모습에 그는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린다.
‘가족’이란 어떤 인연이기에 이런 절망들을 다 이겨내는 가. 그와 전화 통화를 하며 새삼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삶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29살 때였다. 1989년 자동차 엔진 전공으로 박사학위과정에 있던 그는 패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자동차 산업이 번창하던 때여서 학위만 받으면 미래는 보장된 듯 보였다. 친구와의 여행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고 후 절망은 깊었다.
“죽으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지요. 하지만 힘이 없으니 죽는 것도 안 되더군요.”
캄캄한 절망 속에서 그가 다시 삶의 빛을 보게 된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앞길 창창하던 외아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며 재활훈련을 받던 7개월 “엄마는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아들을 살려내야겠다는 의지뿐이었다.
그가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하고 복학을 결심하자 60대의 아버지는 난생 처음 운전을 배웠다. 아들을 통학시키기 위해서였다. 1993년 그는 전신마비 장애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아 신문에도 났다. 그해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왔다. 평소 장애인 돕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는 그의 청혼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22년이 지난 지금 한번 움직이려면 휠체어 두 대가 움직이는 쉽지 않은 거동이지만 서로 돕고 아껴주면서 네 식구는 행복하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그는 그 깊은 계곡을 어떻게 뛰어 넘었을까.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내가 그의 날개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자기 목숨도 기꺼이 내어놓을 만큼 큰 사랑이 그를 마침내 날아오르게 만든 것 같다. 그런 사랑이 있어 사람은 살아간다. 그것이 가족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