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부패스캔들이 터진 가운데 5선에 성공했던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지난 주말 스위스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선거 직전 전격적으로 이뤄진 부패혐의 FIFA 임원들의 체포와 기소가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기소가 자신을 낙마시키려는 모종의 음모와 계산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의혹을 제기할 만도 하다. 그리고 이런 의혹은 제3자 눈으로 봐도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FIFA는 지난 17년간 블래터 1인 지배 하에 놓여 있었으며 그의 재임 기간에 ‘피파 마피아’라 불릴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해 왔다. 그래서 블래터를 제거하지 않는 한 FIFA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줄기차게 제기돼 왔던 것이다.
이번 미 사법당국에 의한 전격 기소에는 분명 블래터를 낙마시키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의도대로 됐다. 블래터가 점증하는 압력에 굴복, 2일 FIFA 회장직에서 전격 사임한 것이다. 이로써 사법당국의 칼날과 유럽 국가들의 비토 속에서 이룬 블래터의 재집권은 불과 수일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재선은 역설적으로 블래터 체제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주었다. 블래터는 지난 17년간 반대 인물들을 가차 없이 제거하면서 가난한 국가들에는 수익금을 동등하게 배분해 환심을 사는 방식으로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해 왔다.
그래도 심상치 않은 사법당국 움직임에 조금은 긴장했는지 블래터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FIFA를 개혁해 나가겠다는 뜻을 피력했었다. 한마디로 ‘셀프 개혁’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약속이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바로 개혁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블래터는 기소를 피하고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가 비리의 몸통이라는 의혹은 여전하다. FIFA는 엄청난 살림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으로 운영된다. 회장 연봉도 비밀이고(수천만달러로 추정된다) 월드컵 때마다 천문학적 수입을 올리지만 지출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게 관행이다. 비영리 기관임에도 은행에는 15억달러의 잔고가 남아 있다. 그러니 FIFA를 마음대로 주물러 온 그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사법적 처벌은 피했지만 이런 초대형 스캔들이 일어난 단체의 수장이라면 도덕적 책임은 면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개개인의 행동을 모두 다 감시할 수는 없다”는 말로 책임을 피해가려 했다. 리더답지 못한 비겁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의 FIFA 개혁 약속에 공허하고 기만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던 이유이다.
개혁에는 철저한 진단과 냉정한 처방이 필요하다. 개혁은 고칠 개(改)와 가죽 혁(革)이 합쳐진 단어이다. 혁은 가죽을 손으로 벗기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가죽 벗기는 일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자기 손으로 자기 가죽을 벗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의 국정원이 2012년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정원 개혁 요구가 터져 나오자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이 스스로 알아서 ‘셀프 개혁’을 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자 “외부에서 메스를 들이대 수술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자기 손으로 제 살을 깎아 내겠다는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는 어이없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개혁의 본뜻을 떠올린다면 이런 비판이 무엇을 말하는지 쉬 이해할 수 있다.
개혁의 출발은 기득권의 혁파이다. 하지만 기득권을 뿌리 뽑기란 쉽지 않다. 블래터 17년 동안 그가 구축해 놓았을 인맥과 영향력을 고려하면 저항이 얼마나 거셀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전격적인 사임으로 FIFA는 비로소 대수술을 위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됐다.
또 권력을 쥐게 되면 뇌구조까지 변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권력의 달콤함에 취하면서 점차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이것은 인간이나 조직이나 똑같다. 그래서 권력자 혹은 권력기관들의 ‘셀프 개혁’ 약속은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면 된다.
스스로 알아서 수술하겠다는 환자나, 환자에게 알아서 수술하라고 처방하는 의사나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셀프’는 패스트푸드점이나 자기계발서에나 어울리지, 개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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