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사의 대표적 미스터리 중 하나로 매리 셀레스트 호 사건이 꼽힌다. 1872년 11월 초 뉴욕에서 이탈리아, 제노바로 향하던 이 배는 4주 후 엉뚱하게도 포르투갈 서쪽 북대서양에서 발견되었다. 배를 발견한 영국 상선의 선원들이 가보니 배 안은 고요했다. 화물이며 식량과 물은 그대로 있는데, 출항할 당시 타고 있던 7명의 선원과 선장, 선장의 부인과 딸은 흔적도 없었다. 배는 멀쩡한데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 사건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서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고 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원인불명의 또 다른 ‘집단 실종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주인공은 벌들, 무대는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 등지. 꿀벌들이 수백만 마리씩 떼로 사라지고 있는데 그 원인을 딱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벌들로 그득하던 벌통이 하루아침에 텅 비어버리는 사태에 양봉업자들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병으로 죽었다면 사체라도 있어야 하는 데 아예 벌들의 흔적이 없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이를 ‘매리 셀레스트 신드롬’이라고 이름 붙였다. 미국에서는 그냥 꿀벌 군집붕괴현상이라고 부른다. 벌집에 여왕벌과 애벌레들만 남아있고 일벌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군집이 무너지는 현상이다.
벌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중요한 존재이다. 평소 눈에도 띄지 않는 이 작은 존재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벌들이 있어 우리가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세끼, 한 달이면 90끼, 1년이면 1,095번의 식사. 그렇게 먹고 먹으며 생명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세 번 씹을 때마다 한번씩 벌들에게 감사를 해야 맞다. 미국에서 소비되는 먹을거리의 1/3은 벌의 수분에 의존해 재배되는 농작물로 만들어진다. 이들 농작물의 가치는 연간 160억 달러 규모.
지구촌 전체로 보면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주요 농작물 100가지 중 71 종의 수분을 벌이 맡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일꾼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번 주 연방 농무부는 지난해 4월부터 올해 4월 사이 양봉장 벌꿀군집의 42.1%가 붕괴되었다고 발표했다. 꿀벌 ‘집단 실종사건’이 처음 보고된 지난 2006년 이후 매년 반복되는 일인데 원인규명에는 아직 큰 진전이 없다. 살충제가 가장 주된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을 뿐이다. 니오니코티노이드 성분의 살충제가 뿌려진 꽃가루를 꿀벌이 먹으면 방향감각이 교란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꿀을 따러 나갔던 일벌들이 떼로 사라지는 현상이 설명된다.
그 외 스트레스, 질병, 농약으로 인한 환경오염 등이 지적되는 데 이 모두를 종합하면 결론은 하나, 생태계 파괴이다. 벌들이 벌답게 살 수 없는 인공적 환경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시스템이 있다.
대규모 농업단지에 대대적으로 살포되는 화학약품들 못지않게 벌들에 해가 되는 것은 이동양봉이다. 농업단지들은 거대한 농토의 농작물 수분을 위해 꿀벌들을 임대한다. 지역 꿀벌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양봉업자들은 벌통을 싣고 1년 내내 이곳저곳으로 장거리 이동을 하며 벌들을 혹사시킨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떨어트려 벌들이 쉽게 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벌들은 병이 들면 동료들에게 감염되지 않도록 멀리 떠난다고 하니 이 또한 ‘실종’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욕심에 벌들이 희생되는 것이다.
이윤추구가 지상과제가 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꿀벌만이 아니다. 꿀벌 같은 사람들도 줄어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다. 개미처럼, 꿀벌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개미가 억척으로 모으기에만 집중한다면 꿀벌은 부지런히 모은 것을 세상과 나누는 것이 차이점이다. 개미를 인색함의 상징이라며 싫어한 사람은 이솝이었다. 반면 묵묵히 꿀을 만들어 아낌없이 나누는 꿀벌을 그는 좋아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곳간이 그득하면, 그래서 내 배가 부르면 배고픈 이웃들에게로 시선이 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유전적 본성에는 움켜쥐려는 자기중심적 이기성 못지않게 남과 나누려는 자기희생적 이타성이 있다. 혼자만 배를 불리면 집단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생존에 불리하다는 것을 진화과정에서 터득한 결과이다.
그런데 요즘은 곳간이 그득해도 시선이 곳간을 떠나지 못한다. 더 채우고 싶은 욕심에 이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질만능주의가 인간의 이타적 본성을 교란시킨 결과이다. 꿀벌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꿀벌 같은 사람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근원은 같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면서까지 소유에 집착하는 이 시대의 욕심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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