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두고 ‘데자 뷔‘(deja-vu),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하던가. 비리가 불거졌다. 그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혐의 사실을 부인한다.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그러자 말을 바꾼다. 그리고는 마침내….
멀리는 한보사태 때 그랬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아온 현상이다. 이번에도 비슷하게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총리가, 전직과 현직 대통령 비서실장들이 모두 리스트에 올랐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다.
어제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실세 중 실세였다. 대통령은 구설수에 오를 때마다 ‘아무 사심이 없는 분’이라며 감싸왔다. 그런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10만달러 수수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인을 하다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자 슬며시 말을 바꾸었다.
말을 바꾸다가 완전히 망가진 사람은 이완구 총리다. 뭐랄까. ‘말 바꾸기’상습범이라고 할까. 거듭되는 거짓말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권력과 출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사람으로까지 비쳐지면서 허둥대는 그 모습은 오히려 불쌍할 정도다.
어디서 많이 본 느낌, 그 기시감을 더 짙게 하고 있는 것은 여전한 박 대통령 특유의 화법이다. 성완종 리스트에는 지난 10여 년 간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해온 사람들, 다시 말해 현 정권의 몸통들이 망라돼 있다. 그런데 마치 남의 일인 양 말을 했다. 그것도 사태발생 한 주가 다 된 시점에서.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도 간접화법으로만 일관했다. 과거정권의 비리가 쌓여 발생한 참사인 것처럼. 문건파동 때는 ‘찌라시에 놀아나는 민심’만 타박했다. ‘내 탓이오’는 없이. 그 ‘유체이탈’화법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상황은 더 꼬이고 있는 것 같다.
‘남의 일처럼 말할 처지가 아니다’- 국내 보수언론의 질타다. 앞으로의 상황 전개에 따라 자칫 대통령에게도 불법 자금문제 책임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런 박 대통령이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 정치개혁차원의 부패척결을 주문한데 대해 비판을 한 것이다.
진위를 떠나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엮어 들었다. 그 초대형 스캔들에 대해 대통령은 사과는커녕 최소한의 유감표명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철지난 권위주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 통치방식에 대해 보수언론조차 일침을 가해온 것이다.
새삼 한 가지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체이탈화법은 위기모면용인가 아니면 본인의 생각, 그 자체인가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딸로 살아온 삶이 성공의 원인이자 지금 처한 곤경의 원인이기도 하다.” 한 국내 관측통의 지적이다. 아홉 살 때 쿠데타로 아버지가 정권을 잡았으니까 어려서는 공주로 살았다. 20대에는 국모(國母)역할을 했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에 발을 디뎠다. 그 후광에 가려 정치의 또 다른 현실이 안 보인다.(아니 안 쳐다본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인지 모른다.) 돈 문제다. 그러다 보니 자기최면에 걸렸다. 나야말로 돈에 대해서는 깨끗하다는.
그 자기최면 탓인가. 국면전환용으로 사정의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게 그런데 그만 부메랑이 되고 만 것이다. 내 탓이 아니다. 사정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을 내세워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한 까닭이다. 그러니까 유체이탈화법은 박 대통령의 멘탈리티 그 자체를 반영한 것이지 위기모면용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진짜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이어지는 분석이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 사고가 굳어져 있다.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 중남미 순방 차 출국에 앞서 ‘이번 일을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계기가 되어야한다’는 점만 재차 강조한 것이 그 증좌라는 거다.
사태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은 대통령 참모들의 무능이다.
2015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1주년의 날. 박 대통령은 ‘허둥지둥 행보’로 일관했다. 대통령은 민간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등의 의전에 얽매여 갈팡질팡하면서 그날 오전에야 팽목 항 분향소 방문 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이미 타이밍을 놓진 상황. 희생자 가족들의 철저한 외면 속에 대통령은 빈 방파제 위에서 발표문만 읽었다. 이후 대통령의 일정은 엎치락뒤치락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황급히 잡힌 게 여당대표와의 회동. 이 바람에 출국이 늦어져 중남미 순방 1차 방문국인 콜롬비아에서의 의전에 차질이 빚어졌다. 여기서 드러난 것이 바로 참모들의 무능에, 정무적 무감각이다.
“이쯤 되면 현 시국은 비상사태다.” 한 국내 보수논객의 한탄이다. 한 정경유착 형 기업인의 죽음과 폭로로 정국이, 나라가 지리멸렬사태를 맞은 것부터가 그렇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의 정당성이 통째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안 돼도 걱정이지만 돼도 걱정이다.”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국 내 보수 일각에서 들려온 소리다. 그 말이 왠지 자꾸 되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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