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뉴욕에 앤소니 콜만이라는 가톨릭 신부가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성이 찾아와 고해성사를 하면서 그는 당시로서 가장 큰 종교적 논쟁에 휘말렸다. 남성은 보석을 훔친 도둑이었다. 죄를 고백한 남성의 부탁에 따라 신부가 보석을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사건은 수습되는 듯했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어이 절도범을 잡아야겠다며 콜만 신부에게 그의 신원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신부가 ‘고해성사 내용은 비밀’이라며 거부하자 경찰은 그를 공무집행 방해로 체포했다. 신부가 법정에 서면서 종교적 자유에 대한 논란이 뉴욕을 넘어 전국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신대륙으로 와서 세운 나라이지만, 그 땅에서 자리 잡은 개신교도들은 뒤이어 온 타종교 집단들을 차별했다. 지역에 따라 가톨릭이나 유대교, 퀘이커 교도들의 활동을 엄하게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감금, 매질, 추방은 물론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4대 대통령)은 당시 한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일부 지역에서 악마적이고 지옥에서나 온 듯한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가 1791년 수정헌법 제1조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한 것은 이런 사태에 대한 반영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20년 후 콜만 신부가 재판을 받을 당시, 소수종교인 가톨릭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신부가 범죄자를 감춰줌으로써 치안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을 법하다. 그러나 재판부는 모든 사람이 양심에 따라 신을 경배하고, 차별이나 편견 없이 자유롭게 종교행위를 할 권리가 있다며 신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해성사의 신성함을 인정한 이 재판은 미국의 종교 자유 전통의 이정표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200년이 지난 지금 ‘종교 자유’가 다시 미국사회에서 이슈로 부각했다. 지난 한주 재계, 정계, 문화·스포츠·연예계 등 지도자급 인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해서 미 전국이 시끌시끌했다. 발단은 3월말 제정된 인디애나의 종교 자유 회복법. 얼핏 들으면 종교로 인해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법 같지만 사실은 반대이다. 아주 단순화하면, 종교의 이름으로 차별할 자유를 주는 법이다. “이게 내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면 차별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소송을 피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법이다.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법의 표적은 성적 소수자들이었다.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보수 기독교 신앙이 배경에 있다.
지난해 인디애나의 뜨거운 이슈는 동성결혼이었다. 주헌법을 개정해 동성결혼을 불법화하려던 시도는 무산되고, 10월 연방법원의 결정으로 동성결혼은 합법화했다. 이때부터 보수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종교자유법이었다. 그리고 지난달 26일 마이크 펜스 주지사의 서명으로 종교자유법은 제정되었다.
그런데 보수 공화당 주, 인디애나가 미처 모르던 게 있었다. 동성애에 대한 미국사회의 인식 변화이다. 각계에서 비난이 쏟아지고 대기업들이 등을 돌리겠다고 위협하자 인디애나는 며칠 만에 항복했다. 동성애자 차별금지 조항을 넣어 다시 법을 만들었다.
온갖 분쟁의 중심에 왜 툭하면 종교가 자리 잡고 있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유혈전쟁은 왜 종교전쟁일까. 종교의 본질은 사랑과 자비, 교리와 신조는 이를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질을 잘 담아내기 위해 그릇이 만들어졌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그릇’이 너무 강조되면서 ‘본질’이 종종 잊혀 진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잊고 교리와 신조에 매달림으로써 종교가 증오와 분열의 도화선이 된 예는 너무나 많다.
부활절을 앞둔 2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도소를 방문해 재소자들의 발을 씻겼다. 세족식 후 교황은 설교에서 “신은 ‘어머니가 아이를 잊어도 나는 결코 너희를 잊지 않는다’고 하실 정도로 신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고 말했다. ‘너희’에는 범죄자, 마약중독자, 동성애자 그외 가톨릭이 죄로 규정한 모든 다른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다 포함될 것이다.
부활절기이다. 예수는 왜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를 졌을까.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왜 돌을 던지지 않았을까. 세상이 손가락질 하는 죄인들과 왜 그토록 어울렸을까. 예수라면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예수에게는 아마 간음한 여자도, 동성애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품어 안아야 할 사람이 있을 뿐일 것이다. ‘종교 자유’로 시끄러웠던 한주를 보내며 나를 돌아본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나는 얼마나 충실한가.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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