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바지를 입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우리가 옷장에서 그날 입을 옷을 고르듯, ‘오늘은 바지~’ 하고 어느 날 문득 누군가가 입게 된 것이 아니었다. 치렁치렁 바닥까지 끌리는 치마 아닌 다른 옷을 여성이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던 때,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도전한 의지의 결과였다.
미국에서 최초로 바지를 입은 여성은 19세기 여권운동가 엘리자베스 스미스 밀러였다.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려면 우선 복장이 편해야 한다는 생각에 통이 풍성한 바지를 만들었다. 거추장스런 긴 치마를 무릎 길이로 자르고 그 밑에 몸뻬 비슷한 바지를 입는 혁신적 스타일이었다. 이를 미국 최초의 여성신문인 ‘더 릴리’ 편집장, 아멜리아 블루머가 신문에 소개하면서 바지 이름이 ‘블루머’가 되었다.
1851년 밀러가 바지를 만들기는 했지만 아이디어를 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의 아버지 게릿 스미스였다. 열성적 노예 폐지론자이자 여권운동 지지자였던 그는 의상이 여성들을 더 무력하고 의존적으로 만든다며 “옷의 감옥을 벗어던지라”고 조언했다.
블루머가 몰고 온 파장은 대단했다. 여성이 바지를 입고 공공장소에 나선다는 자체가 사회질서를 흔드는 불온한 행동으로 비판 받았다. 여권운동가 엘리자베스 스탠튼은 남편의 뉴욕 주상원 재선 캠페인 중 블루머 차림이 선거 이슈가 되어 곤욕을 치렀다. 결국 그는 “옷을 바꿔 입는다고 남녀평등이 오지는 않는다. 편한 옷은 남녀평등이 실현되면 따라온다.” 며 긴 드레스로 돌아갔다.
‘바지’가 야유와 공격의 대상이 될 정도로 여성의 입지가 약한 시대에 여성만의 힘으로 여권운동은 어려웠다. 펌프로 처음 물을 퍼 올리려면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한 이치이다. 물의 길을 열어주는 마중물이다. 철저하게 남성중심 사회였던 19세기 후반의 미국에서 여권운동이 뿌리를 내린 데는 의식 있는 남성들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루시 스톤의 남편 헨리 블랙웰이다. 1855년 동반자적 관계로 결혼한 이들은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남녀평등 부부였다. 블랙웰은 사업으로 일찌감치 돈을 번 후 기금을 대고 캠페인에 동행하며 아내의 여권운동을 돕는데 전념했다.
1세대 여권운동가들의 뒤에는 거의 예외없이 마중물 역할을 한 남편이나 아버지가 있었다.
160여년이 지난 지금 세계 여성 지도자들은 다시 남성들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유엔 여성기구가 전개하고 있는 ‘여성 지원 남성(HeForShe)’ 캠페인이다. ‘남녀평등’이라는 역사적 프로젝트에서 19세기 남성들이 물꼬 트기에 힘을 보탰다면, 21세기에는 눈앞으로 다가선 고지 점령에 힘이 되어달라는, 남녀가 함께 목표를 달성하자는 초청이다.
세계 여성의 날 다음날인 9일부터 유엔본부에서는 12일 간의 여성지위 위원회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1995년 베이징 유엔 여성대회에서 189개국이 여성 권익향상에 합의하며 채택한 베이징 행동강령 20주년을 맞아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짚어보고 향후 과제를 논의하는 회의이다. 회의에 맞춰 힐러리 클린턴은 멜린다 게이츠 재단과 손잡고 준비한 여성지위 현황 보고서 ‘천정 없애기(No Ceilings)’를 발표했다.
보고서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상 여성으로 태어나기에 이보다 좋았던 때는 없었다는 것. 지난 20년 동안 특히 교육과 건강 부문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평등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나라는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 정치, 사회, 경제의 리더십 부문으로 들어가면 양성평등은 멀었다. 전 세계 기준, 여성의원은 20여%, 여성 장관은 17%, 여성이 행정수반인 나라는 18개국, 포춘 선정 500대 기업 중 여성 CEO는 5%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늘 태어나는 여자아이가 기업 CEO 기회를 남자와 똑같이 보장받으려면 81세, 행정수반이 되려면 50세까지 기대려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여성이라서 못하는 게 있나” 싶지만 조금만 관심 갖고 둘러보면 답은 나온다. 국제 정상회의, 미 연방의회나 한국국회의 회의 광경, 혹은 2016년 대선후보 지망자들 … 뉴스를 보다 보면 여성은 어쩌다 보이고 거의 남성 일색이다. 이 사회의 주도권은 여전히 남성이 잡고 있다.
유엔 여성기구는 ‘여성 지원 남성’ 캠페인에 세상의 아버지와 남편, 오빠와 아들들이 참여해 남녀평등 실현의 숨은 공로자가 되기를 호소한다. 유엔의 목표는 우선 10명의 세계지도자, 10명의 CEO, 10개 대학을 확보하는 것. 그들이 여성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면 ‘남녀평등’은 앞당겨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남녀평등’은 누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아내나 누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의 삶을 개선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남성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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