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한 황토벌판과 비릿한 초록 바다가 있는 곳이다. 낮에는 그곳 원주민의 땀 냄새를 맡으며, 밤에는 검은 물결 위에 바스러지는 별빛을 바라보며 가슴 벅찬 16년을 보냈다. LA에서 트럭으로 10시간 넘게 운전하는 거리지만 기다리는 원주민들과의 진료 약속 때문에 피치 못하게 홀로 간적도 몇 번 있었다.(초창기엔 주민들에게 유일한 소식 전달수단이었던 A.M. 방송으로 전 지역에 알려 놓았으니 취소도 힘들었다) 차들도 뜸한 캄캄한 밤중, 도로 위를 달리는 트럭 바퀴소리가 내 귓가에 가까이 다가올 정도로 적막했다.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펼쳐진 넓은 벌판과 산,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트럭 위로 하나하나 또렷하게 빛나면서 또 한꺼번에 쏟아 붓는 듯 별빛을 뿌리는 무한한 공간의 우주 속에서, 그 웅대함과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한 나 자신의 존재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던 겸손의 시간들이었다. 자연, 아니 중간의 거침이 없는 우주와 나만이 갖는 이런 순간들이 성자들이 신과 직접 대화하는 창구인 기도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한 번도 그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던 나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어 일정 중 새벽에는 항상 일찍 일어나 숙소를 나와 홀로 적막한 바닷가를 산책하곤 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모래사장 뿐 이었다. 숙소는 외딴곳 16 마일이나 되는 긴 모래사장 위에 멕시코 정부가 덩그러니 세워놓은 조그마한 호텔이었다. 바닷가 산책은 동이 트기 직전부터 시작했다.
인기척도 없는 새벽 바닷가에서 혼자 걷는 동안 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나와의 만남 이후 타인과의 만남이 더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우리의 생애 중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샘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에만 솟아오른다고 한다. 예술가는 창조를 위해, 작가는 사색의 정리를 위해, 음악가는 작곡을 위해 그리고 성자는 기도를 위해 혼자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그들의 그런 시간을 공유해 본 것 같다.
나는 16년 동안 방에 있는 위성 TV를 단 한 번도 켜본 적도 없었다. 일하는 중 틈틈이 주어지는 짧은 시간이 TV를 보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서다. 의료봉사를 떠날 때 마다 시내 서점에서 시집을 한권 씩 구입하여 짧은 시간 짬짬이 창 밖에 펼쳐 있는 바닷가를 보며 한 구절씩 읽곤 했다. 그렇게 4-5년이 지난 후 부터 봉사 현장에서 느끼는 벅찬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글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고 하기에는 미숙한 아마추어겠지만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한인사회 문학행사나 강의에 자주 참여하게 되었고 행사시 음악이 필요하다면 P.A.장비를 가지고가 그 시 구절에 적합한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한 친구는 병원 일도 바쁠 텐데 왜 아까운 시간을 그런 행사를 쫓아다니며 낭비하느냐고 묻는다. 혹자는 은퇴 계획으로 금전을 쌓겠지만, 나는 은퇴 후 주어지는 시간의 공간을 채울 것 중 문학이라는 목록을 하나 더 ‘위시 리스트’ 바스켓에 넣고 후에 즐기기 위해 기초를 닦고 있다고 나는 대답했다. 내 삶의 여정에 문학도 참여 시키는 것이다.
16년간 내 모든 것을 바친 봉사의 시간은 내게 많은 값진 것을 남겨주었다. 문학은 예상치 못하게 얻어진 선물 중 하나다.
“일에는 은퇴, 삶에는 데뷔” 라는 말이 있다. 16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을 바친 후 받은 이런 선물들이 아직 예정은 없지만 언젠가는 다가올 은퇴 후의 시간에 데뷔해 줄 것이다. 무섭던 파도 소리, 외롭던 갈매기의 울음소리,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채웠던 바람 소리…내 기억 속에 생생한 그 우주의 소리들을 배경 음악으로 들으며 나만을 위하여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혼자만으로도 흐뭇하고 가슴 벅찰 그 시간에 대한 기대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19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행복의 3대 조건으로 첫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둘째 사랑할 사람 혹은 대상이 있을 것, 셋째 할 일이 있을 것을 꼽았다. 희망과 사랑할 대상과 할일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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