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배우 안성기(63) 씨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다. 아역배우로 출발해 거의 평생 연기를 해온 그는 배우로서 극복해야 했던 어려움으로 ‘나이 듦’ 을 들었다. 나이가 40대 후반이 되자 주어지는 역할이 달라지더라고 했다. 당연히 주인공을 기대하며 시나리오를 받아보면 이전에는 생각도 못한 조그만 역할이 맡겨져 있더라는 것이다. ‘나한테 어떻게 이런 걸 맡기나’ 싶어 몹시 자존심이 상하고 힘들었다고 했다.
각자의 무대에서 조금씩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 - 배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나이 들면서 경험하는 일이다. 이전 세대가 물러나고 다음 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나이든 세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다. 노인이 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존재만으로 존경받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가 ‘장애’처럼 취급되는 편견의 시대이다.
나라마다 늘어나는 노인인구로 골치를 앓고 있다. 일선에서 일할 인구에 비해 부양해야할 고령인구 비율이 너무 높아 사회적 부담이 커진다는 계산이다. 미국의 경우 오는 2050년이면 65세 이상 고령자가 배로 늘어 총 8,370만명, 전체의 20%가 될 전망이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5명 중 한명은 노인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회를 초고령 사회로 분류한다.
‘노인 나라’ 일본은 지난 2005년 세계 최초로 초고령 사회가 되었고 지난해부터는 인구 4명 중 한명이 65세 이상이다. 한국은 65세 이상이 인구 10명 중 한명 꼴. 오는 2026년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은퇴가 빨라 50대만 되어도 무대 변방이 아니라 밖으로 밀려나니 나이 듦의 문제가 초고령 사회 못지않다. ‘나이’로 인한 소외감 역시 그만큼 크다.
70년대 통기타 가수 서유석(70) 씨가 25년 만에 신곡을 발표해서 뉴스가 되었다.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 제목은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삼십년을 일하다가 직장에서 튕겨나와 길거리로 내몰렸다”로 시작해 후렴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로 끝나는 노래인데 노년층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하다.
한동안은 한국 드라마에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가 자주 등장했었다. 60대 70대가 한을 쏟아내듯 노래를 부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과거에는 나이가 어리면 무시당했는데 지금은 나이가 많으면 무시당하는 세태를 반증하는 유행가들이다.
노년층에 대한 편견은 미국도 만만치 않다. 예일대 공중보건대학 팀이 20대들의 페이스북 그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노인에 대해 부정적인 젊은이가 3/4에 달했다. 노인들은 샤핑을 비롯해 바깥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도 1/3을 넘었다. 행동은 굼뜨고 판단력은 흐려서 남들에게 방해만 된다는 말인데, 그것이 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젊은 뇌는 인지하지 못한다.
노년은 그렇게 처량하기만 한 시기일까? 오히려 생애 중 가장 홀가분하고 행복한 시기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연령별 행복도가 U 커브를 이룬다는 연구 결과는 이제 고전이 되었다. 20대에 가장 높았던 행복감은 점점 떨어져 50 즈음에 바닥을 친 후 올라가기 시작해 노년이 되면 다시 행복해진다는 내용이다.
원인은 우선 뇌의 변화이다. 매사를 비판적으로만 보던 까칠한 뇌가 나이 들면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부드럽고 포용적이 되면서 행복감이 높아진다고 한다. 아울러 한평생 터득한 삶의 기술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다. 수영을 오래 하면 수영기술이 생기듯 살기를 오래 하면 살아가는 기술이 쌓이지 않겠는가. 산전수전 공중전 겪으며 얻는 지혜 혹은 도통함 같은 것일 것이다.
‘기술’이란 다시 말하면 삶을 보는 시각이다.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깨달음이 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아무리 암담한 상황이라도 앞을 내다보는 여유를 가질 수가 있다. 희로애락의 이면을 보는 시각도 생긴다. 지금 좋은 일이 지나고 보면 나쁜 일로 연결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삶에 찾아드는 사건들을 담담하게 대할 수가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아는 것도 삶의 기술을 높여준다.
성에 차지 않는 배역을 놓고 안성기 씨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가 가장 행복한 때는 연기를 할 때. “그러니 작은 역할이라도 계속 하자. 비중은 작아져도 존재감 자체는 작아지지 않게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성공한 것 같다.
나이 들면 무대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 노년의 시간에 어떤 존재감을 갖고 살지는 각자의 몫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