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시 평가와 퇴임 후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 대표적인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사망으로 얼떨결에 백악관을 물려받았던 33대 대통령 트루먼은 카리스마 넘쳤던 전임자와 후임 아이젠아워 사이에 끼어 존재감이 희미했다. 퇴임 당시 그의 지지율은 22%에 불과했을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역사학자들은 그를 위대했던 대통령들 가운데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과단성 있는 결정을 내렸던 지도자로 평가한다. 트루먼을 가장 잘 수식하는 단어들은 경청과 결단력, 공익에 대한 신념 등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마디는 ‘책임의식’이다. 트루먼은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에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The buck stops here)는 문구를 놓아두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40명이 넘는 미국 대통령들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순위평가에서 트루먼은 항상 7, 8위에 오른다.
리더가 지녀야 할 덕목은 많다. 비전도 있어야 하고 카리스마도 필요하다. 친화력 또한 바람직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책임감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무리의 리더를 찾을 때면 “책임자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책임지는 사람이 리더이고 리더는 책임지는 사람이다. 작은 조직에서부터 기업, 나아가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 원칙은 똑같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책임은 지려들지 않는 사람은 권력자일지는 몰라도 리더라 할 수는 없다. ‘땅콩회항’으로 재판 받고 있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국민들이 더 분노하는 것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승무원과 사무장, 그리고 기장에게 돌리는 무책임 때문이다.
몇 년 전 보스턴 마라톤 중 테러가 발생했을 때 오마바 대통령은 리더다운 태도를 보여줬다. 그는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제가 남 탓을 할 수 없는 까닭은 제가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안전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라고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크고 작은 안전사고와 재난이 끊이지 않는 한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자책어린 사과를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자서전을 펴냈다. 진중함이 결여된 그가 퇴임 2년도 되지 않아 책을 낸다고 했을 때부터 어떤 내용일지 대충 짐작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비판과 비난이 그의 회고록에 쏟아지고 있다. ‘자화자찬’과 ‘남 탓’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적 공분을 산 정책실패를 궤변과 억지논리로 변명하고 광우병 파동의 책임은 전임 정권의 탓으로 돌렸다. 기본적으로 쓰는 사람의 관점에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인 만큼 객관성을 기대하기 힘든 게 회고록이라지만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이 중평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들과 지키지 않은 약속들에 대한 참회나 책임 있는 사과는 찾아 볼 수 없다. 하기야 그는 자신의 책임을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는 ‘유체이탈화법’의 아이콘이 아니던가.
자화자찬과 남 탓은 ‘자기합리화’의 양면이다. 자화자찬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남 탓도 잘한다. 잘 된 결과는 모두가 내 덕이요 나쁜 결과는 남 탓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 중 무리하게 추진한 많은 사업들은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을 합리화하는데 자화자찬과 남 탓이라는 기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국정 최고책임자라는 자리가 애당초 어울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유체이탈화법 하면 박근혜 대통령도 만만치 않다. 박 대통령이 앞으로 언제 어떤 내용으로 회고록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의 복제판은 피하길 바란다. 이 전 대통령은 책에서 후임 정권들에 도움을 주기 위해 썼다고 밝혔는데, 회고록은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표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하면 흔히들 가진 사람들의 나눔, 그리고 기부와 연관시켜 생각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높은 지위에 따르는 책임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 장군들과 장교들은 전쟁터에서 선봉에 서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 지휘관들의 전사율은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높다. “계급은 권력이 아니라 어깨 위에 지워진 책임의 무게”라는 것을 이들은 생생하게 깨우쳐 준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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