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미국이 테러 용의자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자행해 왔다는 내용의 연방 상원 보고서가 공개되자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폭주했다. 다른 나라들의 인권문제에 대해 시시콜콜 간섭을 해 온 미국으로서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특히 미국으로부터 인권 개선 압박을 강하게 받아 온 북한과 중국 같은 나라들에는 역공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됐다.
고문 보고서로 국제사회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누려온 미국의 도덕적 지위는 크게 흔들리고 손상됐다. 하지만 쏟아지는 뭇매 속에서도 고문보고서 공개야말로 미국이 아직은 건강한 나라임을 보여주는 징표라는 평가도 나왔다. 절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치부를 스스로 공개한 일은 정말 미국다운 용기의 발로라는 것이다.
건강한 나라 건강한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내부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예기치 못한 외부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를 극복해내는 자정 능력과 치유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자각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
나쁜 습관 때문에 몸이 망가지고 있는 데도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면 절대 건강해질 수 없다. “건강은 사람이 주위환경에 지속적으로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신체적, 감정적, 정신적, 사회적 능력의 정도”라는 건강의 사전적 의미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마음이 병든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을 쉬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고 말한다. 열등감의 다른 얼굴인 자존심만 강한 탓이다. 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은 건강하다. 자존감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나라와 건강한 사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이것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무엇이 나라와 사회를 망치고 있는지 병인을 정확히 인식하고 똑바로 대면할 때 비로소 건강성 회복을 위한 첫 걸음을 뗄 수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곪고 있는 문제를 없는 일인 양 외면하고 감추는 데만 급급해서는 결코 건강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건강하다는 평판도 얻을 수 없다.
최근 LA타임스는 위안부 강제동원 등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추악한 역사를 감추고 세탁하려는 일본의 태도를 기괴하다고 꼬집으며, 국민과 세계를 상대로 역사를 갖고 장난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본 지도자들을 강한 톤으로 꾸짖었다.
독일과 일본은 똑같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이를 청산하는 일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후 독일은 인류 앞에 나치의 만행을 사죄하고 피해자 보상에 힘썼다. 이런 노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 자신들의 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한 태도를 보이더니 극우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아예 그런 범죄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꾸미려 들고 있다. 있었던 일을 국가적 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려는 전형적인 자기기만이다. 일본은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이런 병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일본이 건강한 나라라는 국제사회의 평판을 듣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준으로 볼 때 한국사회는 얼마나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올 한 해 한국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온갖 재난과 참사,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한 꼴불견 ‘갑질’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사과를 들은 기억은 별로 없다. 일이 터지면 그저 은폐하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사과라는 것들도 대부분 변명 수준이었다.
이래서야 건강한 국가, 건강한 사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국가지도자, 재벌 총수, 군 책임자 등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데 지극히 인색한 나라와 사회는 어떤 기준으로도 결코 건강하다고 보기 힘들다.
2015년은 세월호 진상 규명 등 대한민국의 건강상태를 검진해 줄 국가적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당장은 고통스럽고 수치스럽더라도 오래 곪아 온 종양을 드러내고 제거하는 데 감춤이나 머뭇거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국격과 건강한 자존감을 갖춘 나라의 모습일 것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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