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에 빠지고, 참사 수습과정에서 빚어진 분열로 온 국민이 상처를 입고, 덜 아문 상처 위로 권력 가진 자들과 돈 가진 자들이 온갖 잡음으로 소금을 뿌려댄 2014년 한국. 몸과 마음이 한기로 움츠러들던 즈음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시린 가슴들에 위안을 주었다.
‘미생’은 고졸 사원을 주인공으로 대기업 상사 직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드라마이다. 여러 다양한 삶들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세세히 들여다보는 데, 그러자 겉보기에 번듯한 삶들에도 예외 없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있다. 좌절감이다. 대학문턱에도 못 가본 청년이 인턴-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면서 겪는 ‘당연한’ 좌절감을 중심축으로, 나이와 직급은 다르지만 저마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겪는 좌절들이 곁가지를 이룬다.
세상은 소신껏 최선을 다한다고 ‘꿈’이 이루어지는 곳은 아니라는 점을 ‘미생’은 분명히 한다. 소신이나 최선에 앞서 정치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삶은 팍팍하고 고달프다. 하루 종일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야 하루 분의 삶이 살아지고, 그렇게 열심을 다해도 일이 꼬이니 그냥 열심히 하지 않은 걸로 쳐야만 버틸 수가 있다.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니 이를 악물고 견디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자기 자신을 본다. 자신의 아픔과 좌절을 본다. “꼭 나 같네! 나만 힘든 게 아니로구나!” 하며 위로를 받는다.
죽은 건 아니지만 살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 ‘미생’은 이곳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시지프스가 육중한 바위를 가파른 언덕 위로 밀고 또 밀어올리고, 굴러 떨어지면 다시 밀어올리기를 끝없이 반복해야 하듯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형벌’ 같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미생’이(었)다.
또 다시 한해가 지나간다. 살아갈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어느 해도 쉬운 해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 나이쯤 되면 무슨 고민이 있으랴” 싶은 나이도 막상 되어보면 이전에 생각지 못한 어려움들이 찾아든다. 그래서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고해’이고 우리 모두는 ‘아픔’을 공통분모로 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 깨달음을 돕는 분들이 있다. 신문지면을 매개로 알게 된 후 오랜 세월 인연이 이어지는 독자들,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다. 연말마다 소식을 보내오는 여러 독자들의 사연을 들으면 “이렇게 힘든 삶을 사는 분들도 있구나” 싶어 고개가 숙여진다. 힘든 삶을 ‘힘들다’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내는 분들이다.
60대 초반의 주부 H씨는 치매인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한 지 6년 반이 되었다. 어머니의 성격이 너무 강하고 괴팍해서 모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을 오래 전 그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치매의 초기증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어머니 아파트로 들어갔다.
전혀 거동을 못하는 환자를 돌보는 일은 중노동이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기저귀 갈고, 식사 준비해 먹여 드리고, 틈틈이 집안청소며 빨래를 하고, 목욕시켜 드리고, 병원에 모시고 가고 …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가니 여간 힘에 부치는 게 아니다. 개인적 외출을 해본 게 언제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형제들은 어머니를 치매시설에 보내드리자고 해요. 그곳에서도 환자들을 잘 보살피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사무적이겠지요. 어머니가 그런 환경에서 외롭게 여생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그는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인생을 새롭게 알아간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느껴지면서 정성을 다하니 어머니가 달라졌다고 했다. 분노로 굳어졌던 표정이 편안해지고,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면 딸을 알아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며 그는 좋아했다.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다.
좌절과 아픔이 우리의 공통분모라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아파해주는 마음은 살아갈 힘을 준다. ‘미생’에서 좌절을 거듭하던 주인공들은 어느 순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자신을 위해 아파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로 아파해주는 끈끈한 정으로 선후배 동료들은 ‘우리’가 되고, 그래서 결국 삶은 살만한 것으로 그려진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신경림, ‘갈대’ 중에서) - 울음을 머금은 듯 살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아픔을 서로 함께 아파해주는 근원적 동병상련의 힘으로 우리는 이 고해를 또 한해 넘어간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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