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 외국화가의 경우는 너무 많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운데, 한국인 화가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물’(Water)의 화가 안영일. 오랫동안 존경해온, 올해 팔순을 맞은 노화백이다. 그 분을 안지가 거의 30년이 돼간다. 문화부 애송이기자 시절 인터뷰하면서 처음 뵈었을 때 한 눈에 그 분의 작품과 인품에 반했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안영일은 미국서 개인전을 가진 최초의 한국인이다. 1957년, 서울대 미대 4학년 때 미대사관이 실시한 공모전에서 미국무성 심사위원에게 뽑혀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59년에는 시카고 헐 하우스 갤러리에서, 62년 핀란드 헬싱키의 우시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이 모두가 한국인 화가가 해외화단에 남긴 최초의 기록이다.
전쟁의 포연이 남아있던 당시 한국에는 변변한 화랑도, 그림을 사는 이도 없었고, 유화 한 점 그리려면 일본에서 캔버스와 물감을 구해다가 아끼고 아껴가며 썼다고 한다. 그 시절에 가난한 동양 나라의 대학생이 미국에서 초대전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다.
사실 그는 훨씬 이전부터 천재화가로서 남다른 이력을 쌓아왔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화실에서 네살때부터 세잔의 화집을 보고 그림 그렸던 이야기나, 6세때 일본서 첫 개인전을 가졌던 것, 중학생이던 13세때 국전에서 특선했으나 나중에 나이를 알게된 심사위원들이 입선으로 내렸던 일, 20대에 국전 초대작가로 선정된 것 등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다.
청년 시절 국내 유일의 반도화랑에서 그림만 팔아서 생활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화가였던 안영일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미국인 소장가의 후원으로 1967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듬해 라시에네가 거리의 재커리 웰러 화랑의 전속화가가 됐고, 그림을 그리기가 무섭게 팔려나가는 인기작가가 되어 한동안 아무 걱정없이 그림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그대로만 계속 나갔다면 화가로서 그의 인생은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어느 날 그의 작품을 둘러싸고 갤러리와 콜렉터 사이에 소송이 붙었다. 10년이나 끌면서 작가, 갤러리, 콜렉터, 모두의 진을 다 빼놓았던 송사는 콜렉터가 패소하고 화랑이 문을 닫으면서 끝났다. 그리고 고래싸움에 터질 대로 터진 새우, 바깥세상 모르고 그림 속에서만 살아온 화가 안영일의 삶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때부터 세상을 등지고 칩거하다시피 들어앉아 그림만 그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없던 말수는 더 적어졌고, 대인관계도 거의 사라져 단절된 삶을 살았다. 하루 종일 캔버스 앞에서 작업하다가 유일한 취미인 클라리넷과 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게 다인 생활, 그래도 붓을 놓지 않은 것은 그림만이 그의 삶이고 구원이며 존재이유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화가를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쩌다 찾아뵐 때마다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애써보았지만 예술가의 고집은 쇠심줄보다 더 세서 도무지 소용이 없었다. 간혹 전시회를 열기도 했으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모든 조건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동안 현대미술계는 정신없이 상업화돼버려 마케팅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구조로 변질됐고, 작가들이 작품만으로 승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 돼버렸다.
이것이 그토록 많은 최초와 유일의 수식어를 가진 화가이며, 한때 베벌리힐스에서 그렇게 잘 나가던 화가 안영일의 이름을 지금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다. 사실 개인적인 불운보다 더 큰 이유는 마케팅 부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자 생활 30년에 수많은 화가를 만났지만 이 분처럼 자기홍보 능력이 전무한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마 그래서 내가 더 존경하고 따랐을 것이다.
오늘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제 그 안영일 화백이 세상에 나오게 됐기 때문이다. 내년 1월말 LA한국문화원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2월에는 롱비치 뮤지엄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또 팜스프링스 아트 페어에도 초대됐으며, 한국서도 전시의뢰가 오고 있다. 이를 앞두고 화집 출간이 진행 중이며 여러 콜렉터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작가보다 주위에서 더 기쁨의 탄성을 지르고 있다. 모든 일은 정말 때가 있는가보다.
“화가는 죽어야 돼” 안영일 선생이 늘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아직도 좋은 작품이 안 나왔어”라고도 하신다. 죽은 후라야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발견된다고 믿는 선생이 살아계신 동안 다시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 2015년은 화가 안영일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해가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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