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자(교육심리학자)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늦가을이 완연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록일색이었던 뒤뜰의 느릅나무들이 언젠가 붉은색. 주홍색 옷으로 갈아입고 아침마다 찬사와 연민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나를 향하여 작별을 고하며 하나둘씩 그 고운 잎을 떨군다. 이 느릅나무들은 우리 내외가 삼 년 전에 이웃과의 법정투쟁을 불사하고 지켜낸 가족과도 같고 친구와도 같은 나무들이다. 고옥을 사서 허물어버리고 주위의 나무들을 몽땅 잘라버리고, 거대한 저택을 지으려던 옆집주인이 이에 집요하게 반대하고 나선 우리와 우리의 투쟁에 동조해준 한인교포 이웃들에게 백기를 들어준 덕분에 살아남은 천운의 나무들이다.
서머타임 해제로 벌은 아침 한 시간을 아껴가며 창가에 앉아 조간신문과 한잔의 커피를 즐기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온 우리내외는 요즘 들어 쎈치멘탈할 정도로 늦가을 정취에 흠뻑 빠지곤 한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어찌하다 여기까지 왔나 싶기도 하고 그동안 무엇을 했나 싶기도 하고 감회와 회한이 엇갈림을 느낀다.
우리 집 뒤뜰에 서있는 느릅나무처럼 힘든 세월 거센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잘 견뎌냈다는 것, 우리 곁에는 항상 마음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과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에 감흡한다. 앞으로 남은 세월은 좀 더 보람 있게 살아야지 하고 다짐도 한다.
그러던 중 엊그제 우리 동네 시의원, 시의장, 교육위원, 도시미화 의장 등 여러 분야의 사회봉사직을 거쳐 가며 사십년 이상 헌신하다가 지난해에 별세한 고 P시의원의 부인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한평생 우리타운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남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네의 한 도로를 남편의 이름으로 명명하고자 시정부에 건의했는데 뜻밖에도 정치적인 암초에 걸렸다면서 다음 주에 있을 시청회의에 참석하여 도움의 말을 해달라는 청탁전화였다. 나는 흔쾌히 그리하마 약속을 하였다.
고 P시의원은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삼 년 전 벌목직전에 이른 우리 집 주면의 나무들을 살리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그는 손수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주위환경을 골고루 살피고 나서는 “이 느릅나무들은 적어도 이삼백년은 된 타운의 역사적인 나무들이어요. 잘라버리고 묘목을 심는 다해도 우리 생전에는 다시 이 모습으로 자랄 수가 없어요. 나무들 자체도 아름다우려니와 이들이 뿜어내는 산소는 타운에 거주하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생동력을 공급하는 천혜의 자원이지요. 내가 도시계획 지대설정 조정위원회 멤버들을 설득하여 이 나무들을 자르지 않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보도록 애써 볼게요” 라는 고무적인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인터넷으로 진전사항을 통보해 주었다.
그 후 어느 날 우리는 변호사로부터 우리의 뜻이 관철되어서 옆집주인이 나무 싹쓸이 계획을 포기했다는 반가운 통지를 받았다. 본래의 건축플랜을 뒤집어엎어 우리 집과의 경계선 가까이 만들려던 차도를 반대쪽에 만들과, 이로써 두 집 경계에 서 있는 수십 그루의 나무들을 자르지 않기로 하는데 동의했다는 얘기였다.
원래의 플랜을 뒤집는다는 것은 P의원이 시의회 모임에서 처음 제안한 문제해결 방안이었음을 기억하는 우리는 이 만족스러운 해결책에 그의 슬기로움과 행정능력 덕분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P의원은 세상을 떠났다. 우리에게 성심성의로 도움을 주고 있을 때에도 이미 암진단이 났었을 때였다는데 그는 항상 밝고 낙관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서 우리 타운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나가기 위해 오래된 도시계획 지대설정 지표를 개선할 뜻을 열심히 시사하곤 했었다. 사망 후 어느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남편은 참으로 ‘gorgeous’한 분이였다”고 남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었다. 그 기사에 감동한 나는“당신의 남편은 외형만 멋있는 게 아니라 두뇌도 멋있는 분이였다‘는 조의문을 띄웠었다.
옛말에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생각난다. 고 P시의원은 충분히 이름을 남겨 후세의 사람들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공적을 기리며 그의 이름이 길이 전해지도록 내 주일에 있을 타운 사람들의 모임에서 내가 설득력 있는 스피치를 할 수 있을는지 내심 걱정된다. 훗날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거리를 걷게 된다면 그때의 기분은 오늘처럼 화창한 가을날 화려한 호피를 사뿐히 즈려밟고 걷는 그런 멋진 기분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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