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임 논설위원
18일 38년만의 기록적인 11월 한파와 폭설이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뉴욕시에는 아직 눈이 오지 않았지만 강한 바람과 뚝 떨어진 기온이 두꺼운 코트와 머플러를 찾게 만든다.
11월은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다. 아직은 조금 남았다고 할 수 있는 달인데 요즘 들어 주위의 이민 1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오고 있다.
내 인생의 가을은 어디쯤 와있을까, 9월, 10월, 아니 11월인가, 몇 월이라고 해야 할 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를 놓고 보면 내일 일도 모르는 미래가 다소 두렵기도 하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 ‘을 토마스 만의 소설과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로 한번 보자. 늙음과 젊음, 삶과 죽음, 사랑과 고통, 예술에의 완성 등등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계절에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소설속의 구스타프 아쉔바하는 유명한 작가로 귀족 작위까지 받은 50대 남성이다. 그의 글은 인간의 품격은 절제와 이성에 있음을 역설하고 자신도 그렇게 인내하고 통제하며 사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다. 그는 휴식을 위해 증기를 뿜어내며 베니스로 가는 기선을 탄다. 베니스에 도착해 검정색 곤돌라로 갈아타고 리도 해수욕장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통째로 흔드는 운명과 만난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가족과 함께 온 열네살 소년 타치오를 보게 된다. 연회색빛 눈, 곧게 뻗은 코, 사랑스런 입술, 에로스신의 두상과도 같은 완벽한 얼굴에 무심한 표정, 우아하고 신성하고 진지한 매력에 빠진 그날부터 아쉔바하는 해수욕장, 식당, 베니스 골목, 어디든지 소년의 뒤를 따라다닌다.
당황하고 혼란스런 감정을 주체 못하는 그가 전염병이 도는 도시를 못 떠나는 것도 소년이 아직 그곳에 있기 때문, 결국 소년에게 ‘널 사랑해’ 말 한번 못하고 바닷가 소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눈을 감는다. 그 옆에 절규하면서 완성한 작품이 남겨진다.
1971년에 나온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아쉔바하가 작가가 아닌 작곡가로 나오며 소년에게 젊게 보이려고 이발소에서 머리와 콧수염을 검게 염색하고 입술을 새빨갛게 칠한다. 마치 죽은 사람 염하는 화장과 비슷하다.
이 작품에서 동성애, 파파라치를 떠올릴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자기의 삶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예술적인 완성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자신의 고유한 것을 완성하기 이전에 시간이 전부 흘러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심리 상태를 먼저 보아야 한다. 소년으로 인해 자신의 음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이상적 예술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작가 토마스만은 자신이 좋아하던 구스타프 말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을 메인 테마로 사용하며 감성적인 분위기를 끌고나간다.
잿빛으로 가라앉은 하늘과 어두운 바다, 아름다움, 욕망, 순수, 지나간 젊음, 죽음, 이 작품을 대하면 이러한 것들이 떠올려진다. 수년 전 이맘때 베니스에 며칠 머무른 적이 있다. 운하를 따라 13세기에 지어진 우아한 성당과 화려한 궁전, 웅장한 귀족의 저택들이 물위에 떠있는 채 무너져가고 썩어가고 있었다. 리알토 다리 전면은 식당가로 불야성을 이루나 다리 뒷면의 쇠락한 궁전과 집들은 빈 채로 남아 밤이면 불빛 하나 없이 고적해지는 도시는 슬퍼보였다. 그러나 물, 빛, 풍경의 조화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흘러가버린 시간이, 역사가 보였다.
시간은 빨리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늦게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늘 일정한 속도로 우리 곁을 스쳐간다. 우리가 그 안에 머물고 싶다면 붙잡아야 한다. 주위의 무심한 풍경, 아이의 밝은 미소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통스럽고 소외된 삶이라도, 삼시 세끼 해결하기도 바쁜 신산한 삶이라도, 유랑민처럼 떠도는 삶일지라도 아직 기회가 있다. 살아있음으로......
다소 화려한 꿈이 있다면, 산마르코 광장의 300년이 훨씬 넘은 플로리안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마시고 오케스트라에게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청해 듣고 싶은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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