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임(논설위원)
최근 방영되고 있는 한국의 사극 드라마에 역사의 뒤안길에서 아프게 스러져간 왕자들의 이야기가 대세다. 그동안 조선왕실 500년 역사는 소설, 드라마, 영화로 자주 나오면서 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을 답습해 왔다.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조, 단종, 숙종, 선조, 영조, 정조, 고종, 연산군, 광해군의 이야기는 물론 장희빈, 인현왕후, 폐비 윤씨, 민비에 이르기까지의 워낙 왕가에 드라마틱한 사연이 많았기에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요즘, 왕이 되지 못하고 세자로 명을 다한 사도세자(1735~1762)와 소현세자(1612~1645)의 이야기가 뜨겁다.
현빈이 정종으로 나온 영화 ‘역린’은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는 말로 영화를 시작했고 얼마 전 시작된 SBS-TV ‘비밀의 문-의궤 살인사건‘은 한석규의 영조와 이제훈의 사도세자가 이야기를 끌고나간다.
조선시대 52년 최장기간을 집권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게 만든다. 혜경궁 홍씨는 환갑잔치 후 집필한 ‘한중록’에서 남편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지녔고 영조는 성격이상자로 기록 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담은 책들을 내놓고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저서 ‘사도세자의 고백’에 보면 영조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시로 양위하겠다는 말을 남발했고 결국은 아들을 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나온다. 또한 혜경궁 홍씨가 남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친정 홍씨 가문을 변호하기 위해 한중록을 썼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광인이 아니라 노론에 맞서 북벌을 추진하고 신분귀천 없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려 했다는 관점에서 전개되는 드라마 ‘비밀의 문’은 사후 어둠의 세계 속에 떨어져 있던 사도세자를 253년 만에 일으켜 세울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억울한 기록으로 오도된 자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
조선에 또 한명 비운의 세자로 소현세자가 있다. 소현세자를 다룬 tvN 드라마 ‘삼총사’는 로맨스 액션 드라마로 지혜롭고 활달한 소현세자 역으로 이진욱이 나온다.
지는 해 명나라보다는 떠오르는 해 청나라와 손을 잡아야 한다던 소현세자는 아들을 정적으로 보는 인조에 의해 죽어야 했다.
특히 지난 8월에는 소현세자가 병자호란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을 살았던 중국 랴오닝성 선양 현지에서 한·중학자들이 모여 소현세자의 삶에 대한 학술행사를 여는 등 370년 만에 그를 재조명 했다. 북경에서 서양문물을 접했던 소현세자가 집권했더라면 조선의 개국이 200년은 앞당겨지지 않았을 까 예측하는 것이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나 현대의 대통령의 일지를 쓰는 기록자는 목숨을 내놓고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그 기록의 오도에 억울한 사람도 당연히 생겼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배운 역사를 거꾸로 보거나 비틀어 보는 다양한 시각으로 씌여진 역사서, 소설, 드라마, 영화를 보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우리가 자질이 부족하다고 알던 인물이 사실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를 발견하는 일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길이기도 하다.
지난 25일 청와대 자유게시판 모임, 말하자면 ‘억울한 사람은 오시오’ 하는 단체가 출범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수사기관을 찾아가도 통하지 않자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청와대 앞에서 정기적 모임을 여는 등 직접 활동에 나서서 억울한 사건들을 해결할 것이라 한다.
조선태종 때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위에 신문고라는 북을 달았던 일이 있었다. 임금이 직접 나서서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여 처리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은 국민들 스스로 나서서 내말 좀 들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북소리가 커도 들을 귀가 없다면 곧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도 억울하다고 고소장 낸 사람, 고소를 당한 사람간의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비곡절을 잘 판단하는 배심원, 판사를 만나는 것인데 ‘억울한 사람이 세상 천지에 너 하나더냐?’ 하면 더 이상 할 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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