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창 <보스턴 산성장로교회 담임목사>
우시창 목사<보스턴 산성장로교회>
『나는 전 사장에게 5억 원이나 되는 큰 빚을 졌었다. 그 빚은 늘 나의 마음을 무겁고 괴롭게 했었다. 그래도 전 사장은 참 좋은 사람이다. 빌린 돈 빨리 갚으라고 성화해대지 않고 천천히 갚으라고 하지 않던가?
허덕이는 나를 불쌍히 여긴 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맘은 편할 수 없었다. 그 빚을 어서 갚아야 두 발 뻗고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막막하고 답답할 뿐이었다. 7년 동안 죽도록 일해서 1억을 갚았지만 남은 빚 4억 원이 계속해서 내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또 7년을 더 일해서 1억을 더 갚았다.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또 일했지만 아직도 3억이란 빚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이자까지 눈덩이같이 불어나니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빚을 좀 더 갚았지만 내 마음엔 여전히 평화가 없었다.
그 빚을 모두 갚기 전엔 내 마음에 평화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 무거운 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난 빚더미에 깔려 손발을 꽁꽁 묶인 자유 잃은 노예였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괴로울 뿐이었다. 내 인생엔 낙이 없고 내 삶은 곤고할 뿐이었다. 이렇게 7년, 또 7년, 그리고 또 7년, 빚을 갚다가 귀한 내 청춘이 다 날아갔다. 하지만 오늘은 마침내 그 빚을 모두 갚는 날이다. 빚진 돈을 모두 갚고 나니 오늘에야 비로소 내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간 내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짐을 다 벗어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기쁜가?』
이것은 어떤 채무자가 빚을 다 갚은 날 쓴 일기다. 물론 이것은 허구이며 전에 필자가 어떤 신앙칼럼을 쓰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다. 이것을 여기에 다시 쓰는 것은 필자가 믿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얻게 되는 궁극적인 마음의 상태로 초청하고자 함이다.
필자가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기 전에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모 대학에서 가르치던 공과대학 교수였다. 나름대로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앞을 보고 달려서 원하는 것을 거의 모두 성취한 필자에게 다가온 것은 쉼이 없고 평화가 없는 공허한 마음이었다.
삼십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소위 교회라는 곳은 마당조차 밟아본 적이 없던 자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서 깨닫게 된 것은 “모든 사람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 한다”는 로마서 말씀(3:16-17) 이었고 그것이 참으로 옳은 말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과연 내가 알지 못하는 평강의 길이란 어떤 것이며 그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마음에 의혹이 일었으며 답답함이 더해졌다.
그 때 필자가 골방에서 만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거기에는 한 줄기 빛이 있었다. 그것은 필자의 마음에 크나큰 깨달음과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지는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필자의 마음은 지옥문이 흔들리는 듯 한 큰 진동을 느꼈다. 그 후 꽤 오랜 기간 동안에 걸친 고독하고 신비로운 신앙 여정을 거쳐 필자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만들어낸 허구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계신 실존적인 하나님임을 확신할 수 있었으며, 부족하나마 이제 목사의 길을 걷고 있다.
필자가 확실하게 찾아낸 것은 하늘로부터 마음 속 깊이 내려오는 ‘평화’와 ‘기쁨이다. 그것은 어떤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무 대가없이 거저 주어지는 그러한 평화요 기쁨이다. 이것을 한 번 맛 본 자는 결코 그 이전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리라.
필자가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평화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스런 평화이며 필자의 전 인생을 걸고 쫓아갈 만한 가치를 가져다 준 진정한 평화요 기쁨이다.
인생에 고생과 파멸이 있어 평강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던 필자가 성경을 거울삼아 얻어낸 답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청산하지 못한 ‘빚’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빚’은 곧 ‘죄’라고 불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빚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내 마음에는 평강이 한걸음도 다가서지 못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첫 순간이었으며 그것은 곧 설렘과 기대와 소망으로 이어졌다.
채무에 시달려 본 사람은 갚을 수 없는 빚이 얼마나 고달픈 삶을 만들어내는지 잘 알 것이다. 눈두덩이 같이 불어나는 빚이 과연 우리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며 우리 인생에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우는지를. 진정한 평화는 우리가 가진 모든 빚을 갚을 때만 우리를 찾아온다. 이렇게 모든 빚을 다 갚고 자유롭게 되는 상태를 우리는 ‘샬롬’ 곧 ‘평화’라고 부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리는 궁극적인 평강과 기쁨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지고가야 할 죄의 빚 때문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허덕이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은 죄가 가져다주는 무거운 빚의 짐이며 그 빚은 너무나 많아서 우리가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큰 빚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 빚을 갚아야만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 빚을 갚은 능력이 전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위에서 말한 전 사장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분이다. 스스로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며 자기 짐을 그 앞에 내려놓고 눈물로 탄식하며 탄원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자는 불쌍히 여기시고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주신다. 일부만을 탕감하는 것이 아니라, 한 푼 남기지 않고 모조리 청산해 주신다. 아예 회계장부 자체를 불살라 버리고 기억조차 지워버리신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샬롬”의 의미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여기서 도말이란 말은 <페인트로 덧칠하여 가리다>는 뜻이다. 영어로 ‘blot out,’ 혹은 ‘wipe out’으로 번역한다.’눈물을 씻긴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기억을 지운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고 우리 눈에서 슬픔의 눈물을 씻기시는 분임을 필자는 확실히 믿는다.
’샬롬 알레이헴’이라는 노래가 있다. ‘당신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Peace unto you)’이라는 제목의 노래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 또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필자가 얻은 마음의 평강과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얻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 노래를 부르며 글을 맺는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디모데전서 1: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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