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의 한 대학교수와 통화를 하다가 며칠 전 북가주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1.5세 여성인 그는 안식년을 맞아, 역시 교수인 남편과 함께 다른 대학에서 1년간 지낸다고 했다. “그럼 아이들은?”하고 물으니 “둘째가 이번에 대학에 가서 이제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홀가분하게, 그것도 새로운 곳에서 제2의 신혼을 즐기게 되었으니 ‘축하한다’고 하자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신혼’은 커녕 둘이만 같이 지내는 생활이 너무나 어색해서 적응이 어렵다고 했다.
“남편이 남편으로서의 역할보다 아빠 역할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 우리 둘은 부부라기보다 아이들 키우는 파트너로서만 생활해왔어요. 아이들 떠나고 나서 다시 부부로서의 역할을 찾아가려니 쉽지가 않네요.”
남편과 아내로 단둘이 사는 생활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그 자신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다고 했다.
9월,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상실의 아픔을 겪는 계절이다. ‘언제나 자랄까’ 싶던 아이는 어느새 자라 집을 떠나고 홀로 남은 부모는 한동안 가슴앓이를 한다. 쿵쾅쿵쾅 벅적벅적하고, 빈 그릇이며 간식봉지, 옷가지들이 사방에 널려 있던 집안이 갑자기 정물화처럼 고요해지고 나면, 적막감과 함께 상실감, 그리움, 슬픔이 밀려든다. ‘빈 둥지 증후군’이다.
10년쯤 전만해도 ‘빈 둥지’는 주로 엄마들의 문제였다. 주변의 친지들은 물론, 얼굴 모르는 여성독자들도 전화를 해서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듯 허전하다”고 호소를 하곤 했다. 보통 두 아이 낳고 키워 대학 보내려면 20년쯤 걸린다. 그 긴 세월 정체성의 핵심이던 ‘엄마’ 역할이 하루아침에 잘려나가면 충격은 날카롭다. 아이들 양육에만 전념했던 전업주부들일수록 허탈감이 심해서 우울증 진단을 받기도 한다.
세대가 바뀌면서 아빠들이 진화한 걸까? 요즘은 ‘빈 둥지’에서 엄마보다 아빠가 더 힘들어 하는 분위기이다. 남편이 너무 상심해서 자신은 말도 못 꺼낸다고 주부들은 말한다. 아빠들이 그만큼 자녀양육에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신문사의 한 동료 여직원도 남편이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들 바보’라고 말한다. 하나뿐인 아들이 1년 전 대학에 입학해 기숙사에 내려놓고 온 날이었다. 밤 10시쯤 집에 도착하자 남편은 곧바로 텅 빈 아들 방으로 가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더라는 것이었다. “이 아저씨 왜 이래?”하고 핀잔을 주었다고 그는 말했다. ‘눈물’은 아들에게 다녀올 때마다 반복되곤 했다.
앞의 1.5세 여교수 역시 남편이 아이들을 너무 그리워해서 얄미운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자기 혼자만 아이들 키우나’ 싶다는 것이다.
“며칠 전 남편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러더군요. ‘이때쯤이면 학회도 끝나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 아닌가? (아이들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좀 슬프다’ 하고 말이에요.”
그 남편의 의식 속에서 삶은 여전히 아이들을 중심축으로 돌아가고, 그런 삶의 축을 부부 중심으로 돌려놓으려면 한동안 삐걱거리는 과도기를 거치는 것이 보통이다.
5년 전부터 ‘빈 둥지’의 주인이 된 한 주부도 “남편이 아이들 없는 생활에 적응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렸다”고 말한다. 새 영화가 나와도, 여행을 가려해도 남편의 입에서 당장 나오는 말은 “아이들에게 연락해봐, 언제가 좋은 지”였고, 그때마다 그가 한 말은 “아니야, 이제는 우리끼리 놀아야 해!”였다. 아이들을 마음으로부터 떠나보내고 부부가 ‘우리끼리’ 재미있게 노는 것이 ‘빈 둥지’ 시기의 건강한 가족관계라고 그는 말한다.
어린 새들 떠나고 난 ‘둥지’는 상실이자 해방이다. 부모로서 자녀양육의 임무를 완수하고 부부로서 홀가분하게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엄마, 아빠 역할 하느라 뒷전으로 밀어뒀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남편과 아내로서 부부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이 시작이다.
50 전후에 ‘빈 둥지’ 주인이 되고 나면 앞으로 남은 날은 대략 30여년. 그 긴 세월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부부간의 관계이다. 부부 사이가 좋아야 노년이 행복하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우리는 어떻게 지냈었나?” ‘빈 둥지’ 부부들은 희미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아내나 남편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면 한다. 수십년 부부는 더 이상 가슴 설레는 연인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관계이다. 머리를 맞대고 ‘빈 둥지’를 안락한 ‘사랑의 둥지’로 만들어보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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