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아이들이 자라면서 늘 듣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길 가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난다고 하자. 아이가 아프다고 울면 옆에 있는 어른이 당장 말한다. “남자가 울면 안 되지, 계집아이같이!”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할 때도 쌩쌩 달리지 못하고 비실비실 달리면 당장 누군가가 말한다. “쟤는 달리는 게 꼭 계집아이 같아!”
너무 익숙해서 그 의미를 짚어볼 생각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표현 중의 하나가 ‘여자(계집아이)같다’는 말이다. ‘남자답다’는 건 강하고 자신감 넘쳐서 뭐든 척척 잘 한다는 의미, ‘여자(계집아이) 같다’는 건 약하고 소극적이어서 매사 어설프다는 의미라는 걸 누구도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성별을 기준으로 긍정적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를 가르는 사회문화적 통념, 남존여비의 고정관념에 우리는 오래 길들여져 왔다.
문제는 남자아이들이 ‘여자 같다’는 지적을 최대의 모욕으로 배우며 자라는 바로 옆에서 여자아이들도 같은 메시지를 주입받으며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는 너무 적극적이면 안 되고 뭔가 좀 못해야 여자다운 것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자아이들의 자신감에 치명타가 가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여자아이들의 자신감을 살려주자는 캠페인이 지금 온라인 세계에서 뜨겁게 번지고 있다. 프록터 & 갬블(P&G) 산하 여성생리용품 브랜드인 ‘올웨이즈(Always)’와 이동통신 버라이존(Verizon)의 디지털 광고가 폭발적 인기를 끌며 급속도로 번져나가고 있다.
연간 광고비로 100억 달러를 쓰는 거대기업 P&G는 미국내 광고예산 중 35%를 디지털 광고로 돌렸다. 30초짜리 TV광고나 신문광고 대신 소셜미디어 광고를 하면서 사회적 캠페인을 병행한다는 아이디어이다. 3분 좀 넘는 ‘올웨이즈’ 광고의 제목은 ‘여자같이(Like a Girl)’, 유튜브 조회만 3,300만 회에 달한다.
‘여자같이’는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다.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자인 다큐멘터리 감독 로렌 그린필드가 여러 연령층 남녀 출연자들에게 ‘여자같이’ 달려보라, 싸워보라, 던져보라고 주문을 한다. 하나 같이 소극적으로 대충 시늉만 내는 동작들이다.
그런데 10살 이하의 소녀들에게 ‘여자같이 달려보라’고 주문하자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있는 힘을 다해서 이를 악 물고 열심히 달린다. “이게 ‘여자같이’ 달리는 거죠. 내가 여자니까요”라고 한 소녀는 말한다. 부정적 고정관념이 아직 입력이 되지 않은 나이다.
실험을 토대로 동영상은 “여자아이의 자신감이 추락하는 것은 사춘기”라고 설명한다. ‘여자’ 스테레오타입을 계속 주입받는 데다 이성의 호감을 사고 싶은 나이가 되면서 스스로를 기꺼이 ‘여자 같은’ 이미지에 맞춰 버리는 결과이다. ‘여자같이’ 라는 말에 붙은 부정적 이미지는 부당하다, 성장기 소녀들에게 해를 끼친다, 올웨이즈는 이를 바꾸고 싶다는 것이 광고의 메시지이다.
버라이존 광고는 여자아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감을 상실해 가는 지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우리의 딸들에게 하는 말이 문제이다.
버라이존의 디지털 광고, ‘마음에 자극을 주라(Inspire Her Mind)’는 한 소녀가 유아기부터 10대가 되기까지의 성장모습을 담고 있다. 어린 소녀는 자연 속에서 호기심이 넘친다. 이것도 만져보고 저것도 들여다본다. 그때마다 부모는 말한다. “드레스 더럽히지 마라!” “그런 건 만지면 안 되지!” 좀 더 커서 오빠와 같이 로켓모형을 만드느라 드릴을 사용하자 당장 들리는 말은 “조심해라. 그런 건 오빠한테 건네주지 그러니?”이다.
고등학생이 된 소녀가 과학경시대회 포스터가 붙은 게시판 앞에 선다. 대회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게시판 유리를 거울삼아 립스틱을 바른다. 자연과 과학은 소녀의 관심권 밖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사춘기가 되면서 ‘여자같이’ 된 것이다.
“4학년 때는 여학생의 66%가 과학과 수학을 좋아하지만 대학 엔지니어링 전공 중 여학생은 18%뿐”이라고 광고는 전국과학재단 통계를 인용한다. 학사학위 취득자의 57%가 여성이지만 과학 테크놀로지 엔지니어링 수학(STEM) 등 이공계에서 여학생은 여전히 가물에 콩 나는 수준이다. 남자 엔지니어 7명에 여성은 1명꼴이다. “세상은 넓다. 무엇이든 탐구해봐라” “그건 남자가 하는 일. 이 안에서 조신하게 지내라”는 말이 만들어낸 차이일 수 있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들이 아이들에게는 격려도 되고 상처도 된다. 딸에게 하는 말과 아들에게 하는 말, 딸에게 거는 기대와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어떻게 다른 지 부모들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여자같이’라는 말은 이제 함부로 쓰지 말자. 딸과 아들 모두에게 상처가 된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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