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윤성 논설위원
▶ yoonscho@koreatimes.com
이명박을 거쳐 박근혜 정권으로 넘어오면서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장 뚜렷한 추세는 우경화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집권에 성공한 자칭 보수 세력은 날이 갈수록 합리성에서 멀어지고 있다. ‘합리적 보수’는 단지 집권을 위한 캠페인 구호였을 뿐 일단 권력을 손에 쥔 후에는 극우 본색을 노골화하고 있다. 합리적 보수로 평가 받던 박근혜 캠프 인사들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토사구팽 당한 것이 증거다.
합리적인 보수는 건강한 가치를 지향한다.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 공동체 합의, 그리고 점진적 변화와 전통 관습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극우는 이런 보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늬만 그럴듯한 보수색일 뿐 ‘다름’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마디로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가 없다. 그러다 보니 힘과 순결에 집착한다. 정신적으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맞닿아 있다. 정신 나간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 보여주듯 근본주의 기독교인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극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과거 칼럼들과 강연 내용이 논란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극우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칼럼들에서 그는 진보와 복지에 대해 극도의 증오를 반복적으로 드러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저주의 언어를 서슴지 않은 것도 극우주의자답다.
그가 자신의 교회와 대학 등에서 했다는 발언은 편향성의 정도가 칼럼 내용을 넘어선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불가피했다며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기까지 했다. 조선민족 비하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언에는 일본의 식민지 사관과 식민지 근대화론, 그리고 근본주의적 신관까지 극우적 의식이 종합선물세트처럼 고스란히 들어 있다. 민족에게 엄청난 아픔을 안겨준 질곡의 역사까지도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일 만큼 확고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인사가 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보수를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지 못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문 후보자의 글과 말, 그리고 그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는 사실은 한국 주류 보수의 뿌리가 친일에 닿아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이 보수라는 이름의 배로 갈아탄 것뿐이다. 그 보수의 진짜 얼굴은 수구다.
총리 후보자를 누가 추천했는지를 놓고 설왕설래하지만 최종 낙점은 대통령이 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평소 그의 칼럼을 여러 차례 읽어 봤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대통령의 인식도 문 후보자의 편향성을 닮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평생 신문기자로 살아 온 인물의 글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은 채 총리로 지명했다면 그것 또한 문제다.
박 대통령은 공공성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을 자주 받아왔다. 인사 하는 것을 보면 국민이 원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중용한다. 이번 청와대 수석 개편과 개각에서 다시 한 번 이것이 확인됐다. 공공성의 결여는 국가 지도자로서 심각한 취약점이다. 탕평을 저버린 인사의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우경화이다. 겉으로는 일본을 욕하면서 속으로는 일본의 행태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보수의 적은 진보가 아니다.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는 이념의 시장에서 경쟁하면서 사회발전을 견인해 가는 라이벌일 뿐이다. 보수의 진짜 적은 상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극우와 극좌 같은 극단적 이념이다. 극우는 보수를 욕되게 한다.
극단주의 정치에서는 오직 적과 동지가 있을 뿐이다. 대화와 타협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극우의 준동이 초래하는 최악의 정치형태가 바로 ‘국가주의’다. 국가주의의 폐해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나치즘, 파시즘 같은 극우정권들이 증언하고 있는 그대로다.
극우의 득세는 국가의 퇴행을 의미한다. 이들의 역주행이 지속되면 될수록 대한민국이 균형 복원을 위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은 점점 더 늘어나게 돼 있다. 그런데 대통령의 폐쇄적 인식과 한국의 정치판 지형, 그리고 일단 어떤 흐름이 시작되면(그것이 퇴행이라 할지라도) 쉬 멈추지 않는 관성의 법칙을 고려할 때 당분간 합리적 보수의 등장은 기대할 수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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