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창흠(논설위원)
어릴 적에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면 엄마는 배를 둥글게 쓸어주셨다. 어느 새 아프던 배는 가라앉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의 따스한 맨손바닥이 아픈 배의 맨살위에 계속 둥글게 왔다 갔다 할 때의 느낌이 참 부드러웠다는 기억이 난다. 아내도 가끔씩 다 큰 아이들이 배가 아프다면 “아가 이리와 엄마 손이 약손”이라며 아이들 배를 문지르다가 약을 찾아주곤 한다.
옛날부터 엄마 손은 왜 약손이었을까? 어떤 이는 정신적 안정이 자연치유력을 증대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릴 적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엄마다. 가장 믿고 있는 엄마의 너그러운 사랑은 심리적 안정을 가져오고 “엄마 손이 약손이다”를 되풀이하는 일종의 최면유도로 몸의 자연치유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인체의 자연 치유력은 그 누구도 가늠 할 수가 없지만 “정신이 육신을 지배 한다”는 말인 듯싶다.
다른 이들은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에 비유한다. 이는 일명 위약효과(僞藥效果)로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 약을 진짜 약처럼 만들어서 환자에게 복용하도록 했을 때 실제로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긍정적인 현상을 말한다.
이와 반대되는 현상은 믿음이 떨어지면 효과가 있음에도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 한다. 신뢰가 무너지면 ‘백약이 무효’가 된다는 부정적인 현상이다. 결국 엄마 손이 약손인 것은 배 아픈 아이의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뉴욕에 이민 온지가 어느 덧 20년이 훌쩍 넘었다. 서울올림픽을 못보고 1988년 5월에 왔으니 꼭 26년이 흘러가고 있다. 대한민국, 내가 태어난 고향이요 나를 낳아준 어머니 같은 곳이다. 낯선 땅에서 오래 살다보면 그리워지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고국이라 한다. 허나 이민생활이 더 해질수록 애국자가 된다는 말도 있으려만 나라사랑이 짙어지기는커녕 실망감만 깊어지고 있다.
아마도 고국에 대한 믿음이 점점 얕아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떠나온 뒤 고국에서는 백화점이 붕괴되고, 항공기가 떨어지고, 열차는 탈선하고 여객기가 침몰하는 ‘후진국형 대형 참사가 판박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로인해 소중한 생명이 수없이 사라져 가는 참담한 소식들이 전해져 왔다. 내게 보이는 고국은 하루하루를 ‘예견된 인재’가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 속에서 사는 위태로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의 리더십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의식도 엉망진창이었다. 사회구조 역시 그저 그렇게 변함없이 제자리만 맴돌며 세월 속에 묻혀가는 듯 보였다. 불안이 엉겨 있는 그런 모습만이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은 불신으로 탈바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믿음이 요즘은 아주 침몰하고 있다. 어른 탓에 소중한 어린생명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전남 진도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에 한국정부는 시종일관 우왕좌왕하고 있다, 참사현장에는 가짜가 판치고, 악성루머가 돌아다녔다. 거기에 충성놀음에 취해있는 정치꾼들마저 들끓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 다시 자충수를 둘까 걱정되는 정부, 승객을 버려두고 혼자 탈출한 선장. 임시학부모대책위 대표와 민간잠수사를 사칭한 홍가혜는 진짜처럼 행세한 가짜. “세월호 침몰은 미국 잠수함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과 떠돌아다니는 악성루머와 정체불명의 메시지. 실종자 가족을 ‘선동꾼’으로 호도하고 색깔론으로 논란을 일으킨 정치인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더불어 여전히 나발을 불고 있는 오보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언론들도 그곳에 있었다.
고양이는 목덜미를, 토끼는 귀를 잡아야 사로잡을 수 있고 사람의 믿음을 사로잡으려면 마음을 잡아야 하는 법이다. 고국의 그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세월호 침몰 참사로 딸과 아들을 잃은 유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희망의 끊을 놓지 않고, 고국의 모든 국민이 가족의 마음으로 기적의 기도를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고국의 탓만 하고 있으려니 자괴지심(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든다. 미안한 마음에 아프고 쓰리다. 머리가 지끈하고 배도 아프다. 엄마의 약손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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