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촌서 계속되는 논쟁
▶ 미국 내 보수단체 간에도 예외 인정-불허 싸고 대립, 오바마 정부도 해외 원조금 사용에 반대여론 눈치보기, 유엔은 시술 지지…“스스로 낙태 시도 땐 생명까지 위험”
낙태를 지지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이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선거철마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낙태에 관한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느라 애를 먹는다. 유럽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럽의 지배적 종교는 낙태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가톨릭교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낙태는 정치판에서 다룰 이슈가 아니다. 여성 스스로 선택하고 해결해야 할 지극히 개인적 문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 유권자들의 메아리를 기대할 수 없는 사안이다. 유권자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슈를 선거공약으로 들고 나오는‘먹통 정치인’은 없다. 설혹 있다 해도 이를 이용해 표를 끌어 모으진 못한다.
미국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미국에서 낙태는 선거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폭발력이 강한 사안이다.
연방 대법원은 1973년 ‘로우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낙태권의 테두리를 정해 주었다. 보수주의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당시 판결에 따라 임신 3개월 이전의 임산부에게는 낙태를 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가 인정된다.
다만 임산부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임신 4개월이 지나면 주 정부가 낙태에 규제를 가할 수 있고, 임신 7개월부터는 임산부의 목숨이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곤 낙태를 금지할 수 있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대법원 판결을 사실상 무력화시키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하고 있고 여기엔 낙태에 반대하는 외곽단체들도 포함된다.
그런데 이들의 대표격인 전미생명권위원회(NRLC)가 최근 조지아 지부와 관계단절을 결정했다. 반 낙태 전선의 선봉에 서있는 조지아생명권위원회(GRLC)를 협회에서 제명시킨 것이다.
한창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서 공개적으로 우군 진영 장수의 목을 친 셈이다.
미국의 해외 원조정책이 단초를 제공했다. 새로 손질된 정책안에는 해외에서 이뤄지는 낙태시술에 대한 미 행정부의 자금지원 제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환영해야 할 정책안이다.
문제는 여기에 ‘강간과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 지원규제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단서조항이 달려 있다는 점이다.
14년 전부터 ‘예외 없는 낙태금지’를 줄기차게 주장해 온 GRLC는 정책안에 즉각적으로 반발하고, 반대운동에 착수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GRLC가 정책안의 법제화를 막기 위한 적극적인 캠페인을 시작하자 상위조직인 NRLC는 당혹했다. NRLC는 여론을 고려, 강간과 근친상간 예외조항을 받아들인다는 ‘전략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나온 수차례의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절대다수는 강간당한 여성의 경우 낙태 시술을 허용해야 한다는 확고한 견해를 보였다.
이처럼 여론의 거센 저항을 거슬러가며 ‘절대반대’를 외쳤다가 행여 역풍을 맞지나 않을까 우려한 NRLC는 예외조항을 수용하는 점진적 접근법을 채택한 반면 GRLC는 ‘타협불가’의 기존원칙을 고수한 것이다.
같은 조직에서 엇갈린 목소리가 나오면서 혼란이 가중되자 NRLC는 지난 3월29일 표결을 거쳐 상부지침을 거부한 GRLC를 퇴출시켰다.
표결 결과에 대해 GRLC의 댄 베커 회장은 “유감스런 일”이라고 밝히고 “NRLC의 결정에 상관없이 우리는 미 행정부의 해외 재정지원 대상에 낙태를 완전히 배제시킨다는 기존 목표를 흔들림 없이 밀고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략적 선택을 한 NRLC도 보수진영 내부의 비판이 고조되자 “예외 없는 낙태금지라는 장기적 목표에는 변함이 없으나 이 같은 목표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명했다.
낙태문제에 관한 한 진보진영의 분위기도 그리 좋지 않다.
낙태권 및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그룹들이 느슨하게 뭉쳐 결성한 연합체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잔뜩 실망한 상태다.
진보주의자들은 지난 수년간 해외 원조금의 일부를 전쟁 중 강간당한 여성의 낙태시술에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 행정명령을 발동해 줄 것을 오바마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이 해외에 제공하는 원조금은 미 의회의 결정에 따라 가족계획 용도로 사용될 수 없지만 강간과 근친상간의 경우는 예외다. 오바마 행정부는 예외조항을 계속 유지하려 노력하고는 있으나 낙태 반대론자들의 반발을 의식, 특별 행정명령이라는 ‘꼼수’를 피하려는 눈치다.
특별 행정명령을 끌어내기 위해 활발한 로비를 벌이고 있는 ‘글로벌 저스티스 센터’에 따르면 르완다, 보스니아, 콩고, 시리아 등지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수천 명의 여성이 강간에 의해 원치 않는 임신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인도주의 단체들은 돈줄을 쥐고 있는 미국 의회에 밉보일까 두려워 이들에게 낙태시술을 제공하길 꺼린다. 진보진영이 특별 행정명령에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은 전시 강간 피해자에 대한 낙태 접근권 확대를 지지하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지난해 “강간으로 말미암은 임신의 중절을 위한 비상조치와 시술”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국제적 지지기반을 토대로 유엔 안보리는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에 낙태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바티칸의 유엔 옵저버인 프란치스코 추리카트 주교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는 의사록으로 미뤄보아 결의안 채택과정에서 인공 임신중절에 관한 집중적인 논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글로벌 의료지원 단체인 ‘국경 없는 의사 모임’(Doctors Without Borders)은 “만일 인도주의 단체들이 적절한 낙태시술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전시 강간 피해자들은 접근 가능한 다른 수단을 동원해 임신중절을 시도할 것이며 이 경우 사망까지 포함, 불필요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단체는 미국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자체적 판단에 따라 회원들이 낙태시술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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