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슴 아픈 일이 온 나라를 안타깝게 합니다. 내 자식 같은 우리 애들을 위한 기도 부탁드립니다….” 지난 고난주간 한 가운데에 셀폰을 통해 전해져온 메시지다.
여객선이 침몰했다. 17살.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그것도 근 300명이 선실에 갇혔다. 그 1보가 전해진 무렵 날라든 긴급 중보기도 부탁 메시지였다.
“…기적을 베푸시어 어두운 바다를 밝혀 주시고 구원의 닻줄을 내리시어 어둠과 싸우는 우리 자녀들 한 생명 한 생명 모두 구원해주시기를 기도 합니다… 그 많은 생명들이 바다 깊은 곳에 잠들게 된다면 부활절 날 우리가 무엇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첫 발신자는 누구인지 모른다. 그 기도문이 셀폰을 통해 순식간에 번져나간 것이다.
간절한 기도부탁의 메시지도 메시지지만 정작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는 것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아이들이 보낸 마지막 말들이다.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사랑한다.” “어떡해 엄마, 안녕. 사랑해.” “애들아, 진짜 내가 잘 못한 일 있으면 용서해줘.”
가슴이 미어진다. 동시에 분노가 치민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순간에도 엄마와 아빠를, 또 친구를 생각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남긴 아이들. 그와 반대로 허둥대기만 한 당국, 도망친 선장 등 초라하고 서글프기까지 한 그 모습들이 엇갈리면서.
새삼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어린 아이들에게 왜 그런 일이’라는 질문이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나에게는 무슬림도 크리스천도 보이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인간만 보인다.” 50년 동안 난민을 보살펴왔다. 내전으로 얼룩진 시리아에서. 그런 네덜란드출신의 노신부가 무참히 피살됐다. 그 뉴스에 접하는 순간에.
그가 주로 해온 일은 장애인 사역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 사회의 작은 자들. 그들에게 헌신을 해온 것이다.
내전이 확산된다. 사역지인 홈스가 반군의 거점이 됐다. 그러나 그는 잔류를 택했다. 그 프란시스 반 데르 뤼흐트 신부가 괴한에게 끌려 나가 심한 구타와 함께 머리에 총격을 받고 숨진 것이다. 고난주간을 바로 앞둔 시점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인종도, 종교도 초월한 숭고한 인간애뿐이었다. 그런 그의 무참한 죽음 앞에 저절로 튀어나온 질문이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일이’인 것이다.
납치되고 고문당하고 강간당한다. 맞아죽고 심지어 목이 잘려 죽는다. 시리아뿐이 아니다. 이집트에서, 이라크에서, 파키스탄에서. 인도에서, 나이제리아에서. 베트남에서, 과테말라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고난주간에 속속 전해진 뉴스들이다.
그 희생자는 거의 다가 크리스천으로, 21세기 첫 10년간 피살된 크리스천은 이미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는 다른 말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 종교그룹은 기독교이고 매 시간 11명 정도가 순교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뤼흐트 신부의 죽음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되고 있다. 크리스천을 타깃으로 전개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전쟁, 그 전쟁의 한 단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해 나오고 있는 이야기가 ‘제 3의 엑소더스(Exodus)’다. 20세기 초만 해도 중동지역의 크리스천 인구는 전체의 25% 정도를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5%미만으로 줄었다. 그 크리스천 인구는 계속 줄어 기독교 발상지 중동지역에서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박해 속에 기독교도들은 2000년 가까이 살아온 고향을 등진다. 이집트에서, 이라크에서, 또 시리아에서 오늘 날 목도되는 현상이다. 그 엑소더스의 흐름은 뤼흐트 신부의 죽음과 함께 더 급류를 탈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여자와 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단지 크리스천이란 이유로. 중동지역에서, 아프리카에서, 인도에서. 그리고 저 북녘 땅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비극적 상황과 관련해 던져질 수밖에 없는 것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이’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이다.
왜 그들은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하는가. 도대체 왜. ‘알 수 없다’가 정직한 대답이 아닐까. 단지 떠올려지는 것은 일찍이 C. S. 루이스가 한 말이다.
“하나님은 즐거움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그는 여기에 한 마디를 부연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라고.
‘사랑 한다’는 말만 남기고 바다 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간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 그리고 저 중동 땅에서, 또 북녘 땅에서 들려오는 무고한 피의 외침들. 고난의 계절에 들려온 이 소식들은 무엇을 일깨우기 위한 메가폰일까.
부활의 새 날을 맞아 던져보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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