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윤성 논설위원
▶ yoonscho@koreatimes.com
큰 뉴스가 터졌다하면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는 CNN의 간판앵커 앤더슨 쿠퍼는 미국의 대표적 부호인 밴더빌트 가문의 일원이다. 그의 어머니 글로리아 밴더빌트가 선박과 철도로 엄청난 부를 모은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후손이다. 청바지 디자이너로도 유명한 글로리아의 재산은 약 2억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그런데 쿠퍼는 지난주 하워드 스턴의 라디오 쇼에 출연해 엄마로부터 단 한 푼의 유산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화제가 됐다.
쿠퍼는 “엄마는 어릴 때부터 어떤 상속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며 그런 까닭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신은 항상 일을 해 돈을 벌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안겨주는, 금이 가득한 항아리는 의욕을 죽이는 저주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산을 물려주지도, 받지도 않겠다는 쿠퍼 집안의 스토리는 더 이상 낯설거나 드문 뉴스가 아니다. 자신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부자들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US트러스트가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300만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베이비부머들 가운데 32%가 재산을 자녀들에게 넘겨주기보다는 사회에 환원하는 게 낫다는 견해를 밝혔다. 자녀들에게 아예 상속이라는 말조차 언급하지 않은 부자들도 상당수였다.
이런 추세는 핏줄 본능과 크게 어긋나 보인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을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려는 욕망 덕에 인류는 확장되고 사회는 발전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재산 상속과 관련된 욕구는 가장 자연스럽고도 원초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본능을 거스르는 부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 불을 지핀 인물은 매년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다투는 워런 버핏이다. 버핏은 2006년 6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발표를 한다. 자기 재산의 85%를 사회를 위해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세간의 관심은 그의 자녀들 반응에 쏠렸다. 버핏의 발표 다음 날 세 자녀는 굿모닝 아메리카에 얼굴을 내밀었다. 사회자가 “내 돈은 어디 있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짓궂게 묻자 이들은 “아버지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늘 말해 왔다. 그 많은 재산을 우리에게 물려준다면 그것은 정신 나간 짓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아버지에 그 자녀들이다. 사람들이 버핏을 ‘위대한 투자가’이기 이전에 ‘위대한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빌 게이츠도 얼마 전 테드 강연을 통해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버핏의 영향을 받은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한 작가는 막대한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로 환원한 거부들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꼼꼼히 살펴본 후 이들은 ▲자신들이 꿈을 실현하고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사회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욕망을 충족할 때보다 절제할 때 더 달콤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요약했다. 그러니 이들의 입에서 부자들의 상속세와 소득세를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자녀들에게 재산 물려주기를 거부하는 부자들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몰인정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풍요(affluence)가 초래하는 질병(influenza)인 악성 ‘어플루엔자’(affluenza)가 창궐하는 세상에 이런 냉정함은 재산을 안겨주는 것보다 더 깊은 자녀 사랑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핏줄의 본능을 넘어서는 이들의 모습은 핏줄에게 재산과 권력을 대물림해 주기 위해서라면 편법과 탈법까지 서슴지 않는 한국의 재벌들과 대비된다.
이런 추세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다음 세대로 물려주려는 본능은 여전히, 그리고 끈질기게 지속될 것이다. 다만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부모의 돈 없이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을 때 부모가 물려주는 돈은 비로소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핏줄 본능을 거부하는 거부들을 보며 떠올리게 되는 것은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춘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춘다. 그래서 세상의 바람직한 진보는 비합리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는 버너드 쇼의 명언이다.
핏줄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인간 본능으로 볼 때 합리적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사회적 진보,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의 많은 진보는 핏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선각자들에 의해 이뤄져 왔다. ‘비합리적’인 부자들도 이런 범주에 속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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