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윤성 논설위원
▶ yoonscho@koreatimes.com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첫발을 디딘 새정치민주연합은 그동안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6월 지방선거에서 기초후보들을 공천하는 문제를 둘러싼 고민이었다. 집권세력은 일찌감치 지난 대선 공약을 뒤집고 공천을 분명히 한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천 폐지 방침을 고수했으며 이로 인해 극심한 내홍을 겪어야 했다. 안철수 공동대표는 결국 무조건 공천 폐지에서 한 발 물러나 당원투표와 여론조사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공천 유지 쪽으로 가기 위한 수순으로 풀이된다.
정치와 선거는 현실 속에서의 싸움이다. 공약 준수를 명분으로 기초의원들과 단체장을 무공천할 경우 공천을 한 집권세력의 싹쓸이는 불 보듯 뻔하다. 이 때문에 무공천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셌지만 야당 지도부에게는 부담이 있었다. 이를 뒤집을 경우 지방선거에서 내세우려 한 ‘약속의 정치’라는 프레임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거 판세를 고려할 때 이런 부담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하다.
지금 한국 정치권의 풍경은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으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일찌감치 약속을 깬 새누리당은 공약 파기의 부담을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야권의 공약 준수에 따른 내부 파열음과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야당의 무공천을 무책임한 행위라고 몰아세우더니 공천 유지 쪽으로 가닥을 잡자 이제는 ‘말 바꾸기’라며 격렬히 비난하고 있다. 당초 자신들이 먼저 공약을 뒤집은 데 대한 송구함이나 부끄러움이 전혀 없다. 적반하장도 이 정도면 올림픽 메달감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정치적 신의라는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때때로 약속 불이행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가령 정치인이 일방의 입장에서 유권자들과 한 약속이라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 무엇을 해 주겠다는 공약이나 자신의 거취와 관련한 약속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렇지 못하다면 거짓말 하는 정치인이라 비난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정치에는 이런 약속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상대와 관련돼 있는 약속이 그것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기초후보 무공천은 정치 세력들 간 ‘싸움의 법칙’에 대한 약속이다. 같이 약속을 지킨다면 바람직하겠지만 일방이 먼저 약속을 깰 경우 다른 쪽에게는 그 약속에 속박될 의무가 사라진다. 적과의 싸움터에서는 승리가 우선이다. ‘약속의 정치’는 승리를 거둔 다음 현실적 힘을 바탕으로 실천해 나가면 된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의 양공이 초군을 공격했다. 강가에 먼저 도착한 송나라 군대는 초군이 늦게 도착해 강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참모가 기회라며 공격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양공은 ‘인의’를 내세우며 듣지 않았다. 초군은 강을 건너 전열을 정비했다. 참다못한 참모가 다시 공격을 진언했지만 “전쟁도 정정당당해야 한다”는 양공의 묵살만 돌아왔다.
초군이 전열을 가다듬자 그때서야 공격명령을 내렸다. 결과는 참패였다. 양공은 이때 입은 상처가 덧나 세상을 떠났다.
그의 스승 자어는 이렇게 탄식했다. “싸움은 이기는 게 목적이다. 이렇게 될 바에야 처음부터 노예가 되는 게 낫지 않았던가.” 후세 사람들은 현실감각이 없는 양공의 고집을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정치판의 싸움은 전쟁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인의는 승리한 다음에나 고민해야 할 덕목이다. 맨 손으로 싸우기로 했던 상대가 약속을 어기고 무기를 들고 나오는 데도 처음 약속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랬다가는 지휘관과 병사들 모두가 위험해진다.
명분과 실리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좋은 정치다. 정치가 너무 명분에만 매달리면 이상주의로 흐르고 실리만 좇다보면 기회주의로 빠진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초후보 무공천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충분히 보여줬다. 공약을 깬 집권세력과 대화하고 절충하겠다는 뜻도 여러 번 피력했다. 이제는 명분이 아닌 실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기는 정치가 항상 좋은 정치는 아니지만 이기지 못하는 정치는 좋은 정치가 되기 힘들다. 정치판에서 ‘송양지인’을 고집하다가는 게도 구럭도 다 놓치게 된다. 이것은 필패로 가는 순진하고도 어리석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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