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체육시간. 다이빙을 배우는 시간이다. 3미터 높이의 다이빙보드 위에 한 소녀가 얼어붙은 듯 서있다. 그렇게 서있기를 45분. “여기서 뛰어내리면 위험할까, 괜찮을까” 따져보고 또 따져보던 소녀가 마침내 뛰어내린 것은 수업종료 종이 울리기 직전이었다.
소녀는 50년쯤 전 동독 시골마을에서 자라던 엥겔라 카스너. 바로 엥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이다. “내가 그래요. 그렇게 용감하지 못해요”하며 메르켈 총리가 가끔 털어놓는 어린 시절 에피소드이자 그의 신중하고 조심스런 통치 스타일을 답답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일화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가며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작은 발걸음의 정치를 신조 삼아온 그가 3연임을 확정했다. 이번 총선에서 그의 기민당이 승리하면서 메르켈은 오는 2017년까지 총리직을 맡는다.
영국에서 1990년 마가렛 대처가 물러난 직후 신임 존 메이저 총리는 한동안 ‘여성’으로 불렸다. 일반인은 물론 방송인들까지 입에서 ‘he’ 대신 ‘she’가 불쑥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대처 집권 11년 반 동안 국민들이 ‘여성 총리’에 너무 익숙해진 결과였다. 메르켈은 그 보다 더 긴 12년간 총리로 일하게 되니 2000년 이후 태어난 독일 아이들은 아마도 ‘총리는 당연히 여성’인 줄 알며 자랄 것 같다.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이자 유럽의 최장수 여성총리가 되는 메르켈은 같은 점에서 대처에 비교되곤 한다. 아버지나 남편의 후광 없이 자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는 점, 어려웠던 국가 경제를 성공적으로 되살려 냈다는 점 등이 여성 지도자로서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철의 여인’ 대처에 빗대어 메르켈은 ‘(유럽)대륙의 철의 여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통치 스타일에서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르다. 대처는 남성 보다 더 남성적인 지도자였던 반면 메르켈은 수더분한 동네 아줌마 같은 지도자이다. 우선 시대가 달랐다. 대처가 통치하던 1980년대 정치는 남성의 아성이었다. 남성다운 카리스마 없이는 명함을 내밀 수 없었다. 대처는 확고한 원칙과 전투적 추진력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덕분에 그는 ‘구국의 지도자’라는 칭송과 함께 ‘마녀’라는 혹평을 받았다.
대처가 외모부터 빈틈없었다면 메르켈은 외모부터 수수하다. 정계 입문 초기에는 화장도 하지 않고 대중 앞에 나가서 온갖 핀잔을 들었다. 정치인은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소신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백년대계를 펼쳐내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말로 꾸밈없는 이야기를 하는 데 그 꾸밈없음이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메르켈의 가장 큰 힘은 스스로에 대한 편안함 같다. 뛰어난 총리가 되기 위해서 혹은 인기 있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 가식적으로 뭔가를 꾸미는 법이 없다. 사생활도 공직생활도 자기 자신 그대로 묵묵히 해나갈 뿐이다.
총리 되기 이전부터 살던 베를린 시내 아파트에 그대로 살면서 그는 직접 장을 보고 요리를 한다. 화학교수인 남편은 인터뷰 한번 한적 없고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부부 동반으로 공개석상에 나가는 것은 매년 여름 바그너 음악 페스티벌이 유일해서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이다.
일하는 방식 역시 튀지 않고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다가 신중하게 대처해나가는 식이다. 특징은 경청. 자신이 주도하기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분위기를 파악해 그에 맞게 정책을 펼친다. 국민들의 희망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국민이 원한다면 정파논리를 떠나 과감하게 괘도수정을 한다. 배려와 화합, 유연성에 기초한 실용주의 노선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많은 약속을 파기했는데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총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엄마’로 부르는 국민들은 “엄마가 어련히 알아서 나라를 잘 이끌어 갈까” 하고 믿는다. 유로존 위기 속에서 독일이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냈다는 데 후한 점수를 준다. 모험 보다는 안정을 중시하는 독일인들의 정서와 매사에 신중을 다하는 메르켈의 성격이 행복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이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역시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열 자식 안 굶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들을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었다. 한국 국민들은 ‘어머니’를 느끼고 있을까. 어머니가 되는 첫 걸음은 귀를 여는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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