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은 어느 날일까. 1945년 8월6일이라는 것이 미국의 일반적 시각이다.
그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다. 이후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던 군국주의 일본의 태도에 변화가 보였다. 그리고 한 주 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태평양에 마침내 평화, 원폭이 해내다’- 당시 미국신문의 헤드라인이다.
‘원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하나의 정설로 굳어졌다. 과연 그럴까.
최근 들어 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원폭이 아닌 스탈린의 참전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불러왔다는 거다. 브리티시 아메리칸 시큐리티 인포메이션 카운슬의 워드 윌슨의 주장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은 1945년 8월6일이 아닌 8월9일로 보고 있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어서가 아니다. 소련이 선전포고와 함께 대일 전선에 참전한 날이고, 일본의 대본영이 연합국 측이 제시한 무조건항복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도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폭투하가 항복을 불러 오지 않았다’- 그 첫 번째 논거로 윌슨은 타이밍을 제시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지만 대본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3일 후인 8월9일에나 항복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 반응시간이 너무 늦다. 게다가 항복을 논의한 그날의 대본영 회의는 나가사키에 또 한 차례 원폭이 투하되기 전에 열렸다. 이런 점에서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항복을 불러온 결정적 계기로 보는 데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1945년 일본의 전 도시는 미국의 대대적 공습으로 불바다가 됐다. 그 시작은 3월9일과 10일의 도쿄 대공습으로 하루사이 12만 명이 희생됐다. 그해 여름 인구 10만 이상의 68개 일본의 도시 중 64개 도시가 불바다가 됐다.
그 정황에서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대본영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매일 이어지는 공습에 국민들은 면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일본국민으로 하여금 하나가 되어 저항하게 할 것이다.”당시 외상이었던 시데하라 기주로가 보인 반응이다. 온건파로 전후에 총리도 지냈다. 그런 그가 한 말이다. 그러니 강경파로 알려진 지도자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공습으로 인한 국민의 피해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간을 벌어 전략적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나 하고 있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계속되는 대규모 공습의 하나 정도로 보았을 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 무렵 대본영은 전쟁이 오래 갈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때문에 가능한 한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항복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강구된 방안의 하나는 외교적 옵션이다.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는 소련을 중재자로 내세워 종전협약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군사적 옵션으로 미군의 일본 본토 침공 시 막대한 피해를 입힘으로써 유리한 항복 조건을 받아낸다는 것이다. 대본영은 미국의 본토 침공이 수개월 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고 관동군을 빼내 본토 방위 임무를 맡겼다.
이를 통해 노린 것은 천황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전범(戰犯)처리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한국 등 식민지에서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또 다른 목적이었다.
소련의 참전으로 이 두 가지 전략적 옵션은 일시에 사라졌다. 소련군의 신속한 남하와 함께 열흘 후면 호카이도까지 점령 될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일본은 서둘러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원폭투하는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오히려 면죄부를 주었다는 게 뒤따르는 평가다.
무모한 전쟁으로 대파국의 상황을 맞았다. 전쟁 수행과정에서 자국민도 속였다. 거짓말로 일관한 것이다.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여기서 발견되는 것이 일본지도자들의 교활한 처신이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미국의 가공할 신무기 원폭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논리와 함께 일본을 원폭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 와중에 천황제는 유지되고 보다 철저한 전범색출과 처리과정이 생략됐다. 과거사에 대한 회개는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원폭 피해자임을 내세워 국제 사회의 동정을 유발시켰다. 그 결과로 군국주의 일본이 한국, 일본 등 점령지에서 저지른 만행이 호도되고 있다는 지적도 따르고 있다.
“폭염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을 비롯해 참배객은 오히려 늘었다. 작년의 16만1000명에 비해 올해에는 17만5000명이 다녀간 것이다. 그 가운데 뭔가 살벌한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다.” 2013년 8월15일 시점에 이코노미스트지가 전하는 일본 야스쿠니 신사의 모습이다.
무엇을 말해주나. 과거역사에 대한 심각한 망각증세인가, 아니면 총(總)우경화현상인가. 그보다는 일본 스스로의 고립이 아닐까.
“바보 같기도 하면서 사악하기도 한 일본지도자들의 행보에 서방 지도자들도 경계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지적이었던가. 그 경고가 새삼 생각나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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