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논쟁은 항상 정치적 이념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다. 나라 살림을 위해 누구로부터 얼마를 거둬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된 지난 수십년동안 정치권의 핵심적인 갈등 이슈가 돼 왔다. 이런 양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주 한국정부가 복지재원 확보를 위해 중산층 세 부담 증가를 골자로 한 세법개정안을 발표하자 “증세는 없다”고 수차례 언급해 온 박근혜 대통령이 또 공약을 뒤집었다며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국민들의 저항이 의외로 거세지자 대통령은 “원점부터 재검토하겠다”고 발을 빼는 등 진화에 부심하고 있다.
야당은 이번 세제안에 따른 중산층 부담을 ‘세금폭탄’이라고 프레임화 하고 있지만 사실 엄청난 부담이라고까지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국민들의 반발은 실질부담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돈 많은 계층은 살짝 피해가면서 만만한 서민 대중들에게 이를 떠넘기려 한데 대한 상대적 박탈감의 표출로 보면 된다.
박근혜 정부는 서민경제 살리기와 경제민주화 등을 내걸어 권력을 잡았지만 기본적으로 가진 계층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보수정권이다. 출범한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본색은 다 드러난 상태이다. 복지를 위한 증세가 필요한 상황이라 해도 부자들의 소득세와 기업의 법인세에는 손대고 싶지 않다는 의중을 개혁안을 통해 드러낸 셈이다.
이런 입장은 미국 공화당의 기본강령과 똑같다. 공화당은 부자 감세당이다.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는 것은 미국의 성장을 견인하는 민간부문 투자의 목을 조이는 행위”라는 것이 레이건 이후 지금까지의 일관된 당론이다.
이들은 돈을 물에 빗대어 부자들의 배를 불려주면 언젠가 그 물이 밑으로 흘러내려 가난한 사람들의 입을 적셔준다는 이론을 신주단지처럼 받들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정권만 잡으면 대폭적으로 부자감세를 해 왔고(1980년대 초 70%에 이르렀던 최고 부자세율은 공화당 대통령들 때 28%까지 낮아졌다) 현재도 민주당 정권과 이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충돌을 계속하고 있다.
과연 부자들의 세금을 줄여주면 경제가 더 성장하게 될까. 이념적 좌표에 따라 대답은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중립적 연구에서는 그 상관관계가 없거나, 설사 있더라도 아주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방의회의 의뢰를 받아 1945년 이후 부자감세와 경제성장률간의 연관성을 연구해 온 경제학자 토마스 헝거포드는 “감세는 경제성장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단지 경제적 불평등만 심화시켰을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최근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공화당 부시 시절의 경제성장률을 비교해 보면 이해가 좀 더 쉽다. 부자감세가 극에 달했던 부시 8년 동안 미국 경제는 총 17% 성장해 부자증세를 했던 클린턴 시절 8년 성장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부자감세로 0.2~0.3%대의 보잘 것 없는 추가성장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증세를 통해 교육과 인프라 등의 국가 투자를 늘리는 것이 경제성장에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 최근 연구들에서 밝혀지고 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부자들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밑으로 잘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근 한국의 10억 이상 금융자산을 가진 부자 78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들이 한 달에 벌어들이는 평균 수입은 3,911만원이었지만 평균 지출은 831만원에 불과했다. 번 돈의 채 25%도 지출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돈은 말 그대로 잘 돌아야 경제성장과 경기진작 효과를 가져다주는 데 부자들의 주머니에 일단 들어간 돈은 나올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도 금고를 꽁꽁 닫아놓고 있는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돈이 돌고 돌아 경제에 미치는 효과를 ‘승수효과’라고 한다. 그런데 정부가 부자들의 주머니에 넣어준 돈의 승수효과는 0.23(1달러에 23센트)에 불과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푸드스탬프는 그 효과가 1.73에 달한다. 그러니 누구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는 것이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될지는 자명해진다.
복지확대는 시대적 추세이며 이를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하다. 서민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불평등의 심화를 초래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러한 부담의 분담이 이뤄질 때만 지속 가능한 국가의 미래가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을 정치인들은 알아야 한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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