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 중에서>우리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희미한 몸짓에 불과한 것은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그것은 사실’이라고 우리가 이름 불러주지 않으면 역사의 영역에 자리잡지 못한다. 사건은 개개인의 사적인 기억의 장으로 밀려났다가 시간과 더불어 묻혀버린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거의 그럴 뻔했다.
지난 30일 LA 인근, 글렌데일 중앙도서관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제막되었다. 위안부 기림 조형물이 미동부에는 3개나 되지만 서부에서는 처음이어서 한인들의 관심이 각별했다. 가두모금에도 제막식에도 기대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일본계 주민들이 언론사들에 이메일을 보내고 공청회장을 점령하다시피 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종군위안부 사건은 이제 인권이슈로 확실하게 뿌리내려서 웬만큼 흔들어서는 뽑히지 않는다.
‘위안부’는 오랜 세월 잊혀진 이슈였다. 피해자들은 창피해서, 한국정부는 대일관계 눈치 보느라, 일반 국민들은 ‘민족의 수치’라서 덮었다. 1990년대 초반 정신대 대책 운동이 시작되자 여론은 오히려 반발했다. “부끄러운 여자들이다” “무슨 자랑거리라고 떠드는 가” 하는 분위기여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신문지로 얼굴을 가리고 시위에 참여했다.
이제 할머니들은 당당한 인권운동가로 변신했다. 음지에서 홀로 울분을 삭여야 했던 그들,힘 없어 무참하던 그들을 향해 ‘이름을 불러준’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글렌데일에 소녀상이 세워졌다고 멀리 플로리다에서 기뻐하는 분이 있다. 80세의 이동우 여사이다. “아무 것도 없는 데에 씨를 뿌려 이슈로 만들고 꽃피고 나무 자라는 것 보는 기쁨이 크다”고 그는 감격해한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한 주인공이다.
그가 정신대 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20여년 전이었다. 1992년 11월 황금주 할머니(지난 1월 별세)가 유엔에서 일본군 성노예 실상을 증언하느라 방문했을 때 그가 참석하던 워싱턴한인교회가 황 할머니를 초청했다. 증언과 기도 모임에서 할머니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은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우리끼리 가슴 아파하며 울고 말건가” 고심하다가 미국사회에 알려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당시 그는 세계은행 복지정책 담당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신대 관련 보도자료를 만들어 비서를 통해 워싱턴 포스트, 뉴욕타임스, 폭스 뉴스, CNN 등 주요 미디어에 보냈다. 반응은 없었다. 다시 언론사들에 일일이 전화를 하자 폭스 뉴스가 관심을 보였다. 폭스 뉴스가 황 할머니의 증언을 받아 그해 추수감사절 날 보도하면서 미국사회에 종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어 워싱턴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근 10년 그는 회장으로 일했다. 연방의원들과 꾸준히 접촉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연방의사당에서 정신대 진상을 알리는 전시회를 열고, 지난 2000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인권상을 수여하는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해냈다. 2007년 연방하원이 종군위안부를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 사건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공식 인정과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런 씨뿌리기, 정지작업 덕분이었다.
이후 위안부 대책운동은 워싱턴 정대위와 아울러 뉴욕의 시민참여센터(대표 김동석), LA의 가주한미포럼(대표 윤석원)을 주축으로 바톤을 이어가고 있다. 종군위안부라는 아픈 역사가 세대를 이어가며 한인사회에 한 흐름, 역사를 만들고 있다.
글렌데일 소녀상을 세운 가주한미포럼의 윤 대표도 지난 몇 년 사업을 제쳐두고 외롭고 고된 싸움을 했다. ‘이름을 불러주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다. 이번 제막식에 참석한 김복동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지난봄 서울에서 열린 할머니의 미수(88세) 잔치에도 참석했다. 할머니들과의 인연이 끈끈하다.
“아무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어 서운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내가 ‘어머니’라고 불러드립니다. 나 역시 6.25 피난 중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크거든요.”짐승의 시간 같던 그 시대, 위안부는 “우리 어머니였을 수도, 친척 중 누구였을 수도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가족 중에 피해자가 없었다면, 그분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편안하게 살아온 게 아닐까, 그래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위안부 이슈에 헌신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풀뿌리 운동은 전개되고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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