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2011년 MVP였던 밀워키 브루어스의 라이언 브론이 금지약물 복용으로 금년 시즌 잔여경기 출장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는 이미 한차례 금지약물 검사에서 적발됐지만 천연덕스러운 거짓 결백주장으로 빠져나온바 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결정적인 새 증거가 나오면서 결국 징계의 철퇴를 맞았다.
하지만 브론은 이미 챙길 것 다 챙겼다. 금년도 남은 연봉은 못 받지만 오는 2020년까지 1억2,750만달러의 잔여계약이 남아있다. 브론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겠지만 그는 양심을 저버린 대가로 고작 65경기 출장정지를 당하고, 대신 천문학적인 돈을 챙겼다. 소변검사에서 약물이 검출되자 검사 시스템과 소변 채취요원을 엉터리라고 비난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명예를 지키려 목숨까지 버리지만 누구는 손에 쥘 수 있는 돈과 성공을 위해 보이지 않는 명예라는 가치쯤은 대수롭지 않게 버린다. 셀프진급이기는 하지만 별을 네 개나 달아봤고, 불의한 방법으로 찬탈한 것이긴 해도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온갖 염치 다 던져버리고 자기 재산 지키려 벌이고 있는 코미디 쇼는 보는 사람들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을 둘러댄다. 그에게서는 눈곱만큼의 명예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런 인간들을 세상은 비난하고 손가락질 한다. 하지만 몰염치와 파렴치가 과연 이들만의 일탈일까. 후안(厚顔), 즉 두꺼운 얼굴은 이제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앞서 나가는 데 가장 필요한 처세가 됐다.
특히 정치권에서 후안과 몰염치는 성공하는 데 필수적인 DNA이다. 뻔뻔한 언행과 식언은 일상적인 규범이 되다시피 했다. 일단 무책임한 장밋빛 공약을 내걸어 당선되고 나서는 안면몰수하고 이를 손바닥처럼 뒤집어 버리는 게 일종의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인들의 후안은 한국과 미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성 스캔들에 휘말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앤서니 위너 전 연방 하원의원과 엘리엇 스핏처 전 뉴욕검찰총장이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겠다며 뉴욕시 공직에 출마해 뛰고 있다. 아무리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도덕적 기대치가 낮고, 개인적인 추문에는 관대한 문화라 하더라도 이들의 출마결정이 너무 이르고 몰염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부끄러움은 점차 낡은 유물이 돼 가고 있다. 경쟁과 성과지상주의에 몰입된 신자유주의 사조가 지배해 온 지난 30여년 동안 부끄러움은 약자와 패자의 감정으로 치부되며 설자리를 잃어왔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듯 정치적으로 성공한 거짓말(당선)과 성공한 부정행위(대박계약) 역시 처벌할 수 없다는 일그러진 가치관이 뿌리를 내려왔다.
스포츠계의 약물문제와 정치권의 수준저하가 이 시기에 유독 두드러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입신양명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두꺼운 얼굴과 검은 마음으로 처세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청나라 말기 난세의 ‘후흑학’이 21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끄러움에 관해 가장 많은 가르침을 남겼던 맹자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한다. 한 사회학자는 부끄러움을 “참다운 자아를 정립하고 통제하는 자기처벌의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그렇게 본다면 부끄러움야말로 정말 강한 사람의 감정이다.
1961년 영국 정계의 스타로 승승장구하던 젊은 정치인 존 프로퓨모는 화류계 어린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스파이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유명한 크리스틴 킬러 사건이다. 그런 프로퓨모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자 영국인들은 애도했다. 한순간의 실수로 추락한 프로퓨모는 사망할 때까지 40년 넘게 부인과 함께 런던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다.
봉사에 감명 받은 여왕이 직접 그를 찾아갔다. 여왕이 “이제는 충분히 속죄를 한 것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는 “세상이 나를 용서해 준다 해도 나는 거짓말을 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세상보다 훨씬 빠르게 자신을 용서하는 후안의 군상들에게 프로퓨모의 삶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가르쳐 준다. 부끄러움을 보고 싶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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