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부에서 국가안보와 관련한 정보업무를 총괄했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구속됐다. 정치에 개입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더니 개인 비리가 드러나면서 결국 영어의 신세가 됐다. 권력을 놓자마자 교도소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화무십일홍의 무상이 느껴진다.
원 전 국정원장은 MB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국정원장 시절 MB와의 관계에 대해 “대통령이 당부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아는 사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그를 두고 “입속의 혀처럼 처신한다”는 세간의 평이 많았다. MB는 충성심 강하고 말 잘 듣는 그를 요직 중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국정원장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이것이 사단이 됐다. 국정원장은 오직 국가의 이익만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자리임에도 원 전 원장은 주군의 의중을 헤아려 정권의 이익을 지키는 데 너무 열심이었다. ‘공적인 감투’를 쓴 채로 ‘사적인 충성’을 도모하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 오르면 공적인 영역으로의 의식전환이 뒤따라야 함에도 그는 여전히 사적인 관계에 갇혀 있었다. 그가 저지른 개인비리의 바탕에도 이런 무분별한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면 된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공직자일수록 독직과 부패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무분별이 예외적인 일탈이 아니라 정치와 공직사회 전반의 잘못된 문화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정치가 안고 있는 가장 후진적이며 고질적인 적폐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공공성의 결여’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헌법은 명시하고 있다. 공화국은 공화주의에 기초한 국가이다.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공화주의는 공공이익과 공동선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보다 우위에 놓는 사상이다.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이 이런 정신을 갖고 있는 나라여야 진정한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은 무늬만 공화국이다. 긴 세월 독재와 보스정치를 경험하고, 그런 가운데 보스가 충성스런 가신들의 형편을 살펴주는 후견 시스템이 지속되다 보니 정당은 사당화 되고 공직은 분배물이 돼 버렸다. 시민항쟁으로 민주적 절차는 되찾았지만 이런 문화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을 앞세우는 군대조차 그렇다. 하나회 같은 사조직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사적인 관계에 따라 밀어주고 끌어주는 구태는 여전하다. 이렇게 감투를 쓰게 되면 자연히 그 자리에 앉혀준 사람이나 세력에 보답하고 잘 보이려 과잉충성하게 된다.
지난달 말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이 ‘형님…’ 하면서 같은 당 김무성 의원에게 보냈던 문자메시지는 한국정치 공공성 결여의 산 표본이다. 이 메시지는 김재원 의원이 NLL과 관련한 김무성 의원의 비공개회의 발언 외부 유출자로 지목되자 이를 해명하려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조폭문화를 연상시키는 표현 일색이어서 비판을 받았다.
특히 “형님께서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생각”이라는 대목에서는 한 지역구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찾아 볼 수 없다. 공적인 감투를 쓰고 있음에도 ‘형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적 충성을 다짐하는 이런 인물이 과연 유권자와 공익을 위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한 정치학자는 “한국정치에서는 공공성이 붕괴된 적이 없다”고 대담한 진단을 내린다. 그런데 이유를 듣고 보면 조금 서글퍼진다. 공공성을 실현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루 속히 공공성을 회복(이 또한 전에 있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니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하는 것이 한국정치의 가장 큰 숙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의 뚜렷한 공공의식이 무엇보다 선행돼야 한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사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나랏일을 그르치게 된다. 특히 깜냥이 안 되는 인물의 사적인 충성을 공적인 감투로 보상해 주려는 사고방식은 가장 위험하다.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판 혼란과 진흙탕 싸움의 중심에도 이처럼 낙후된 정치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정치가 ‘일류’는 고사하고 ‘이류’라는 평가나마 받으려면 많이 달라져야 한다. 세계에 없는 네 가지라는, ‘독일인 코미디언’ ‘미국인 철학자’ ‘영국인 요리사’ ‘일본인 플레이보이’에 ‘한국인 정치가’를 추가해야 한다는 유머가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는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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