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치열한 영화판에서 흥행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소재의 하나가 재난이다. 재난영화는 만들기 힘들지만 일단 만들어만 놓으면 흥행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아도 된다. 평단의 혹평을 받았던 재난영화들이 박스오피스에서는 대박 난 경우가 영화계에서는 아주 흔하다.
재난은 현실에서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끔찍한 상황이다. 하지만 가상 체험을 위해서는 기꺼이 지갑을 열어 영화표를 산다. 무기력하고 통제가 안 되는 재난상황을 대리 체험한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후 의외로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 속 상황과는 달리 자신은 여전히 현실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생기는 안도감이다.
재난영화뿐 아니라 재난보도가 만들어 내는 감정도 이와 비슷하다. 이런 보도를 접하면서 TV 시청자들과 신문 독자들은 안타까움과 함께 자신들은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그래서 관심을 끄는 데는 재난보도를 따라올 만한 소재가 없다.
6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발생한 아시아나 항공기 참사 후 한국과 미국 언론들은 연일 이 사고를 크게 보도하고 있다. 이 뉴스에 쏠린 관심이 그만큼 뜨겁다는 얘기다. 항공기 참사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트라우마에 가까운 두려운 감정을 갖고 있다.
일단 재난과 맞닥뜨리게 되면 보통 3단계의 반응이 나타난다. 거부와 숙고, 그리고 결단의 단계이다. 이런 사실을 처음 규명해 낸 사람은 새뮤얼 헨리 프린스 신부다. 그는 지난 1917년 12월6일 아침 캐나다 헬리팩스항에서 발생해 1,963명의 사망자를 냈던 프랑스의 폭발물 운송선 몽블랑호 화재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재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 신부에 따르면 재난이 발생하면 우선 재난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부반응이 일어나며 그 다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숙고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는 행동을 결정하는 결단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3단계 과정을 얼마나 단축시키느냐에 생사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재난에는 ‘골든타임’이 있다. 골든타임은 중증 외상환자들을 소생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뜻하는 의학용어다. 비행기 사고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전문가들은 골든타임을 통상 90초로 본다. 이 시간 안에만 대피하면 생존확률이 크게 높아진다는 말이다.
요즘 비행기들은 90초 안에 승객들이 사고 기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잘 설계돼 있다지만 결국 생존을 결정짓는 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다. 인간의 대응방식이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말이다. 아시아나 항공 사고가 대형 참사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승무원들의 침착한 대응 덕분이었다.
승무원들은 “반복적으로 훈련을 받았던 덕분에 사고 발생 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사고가 발생하자 아주 짧은 순간의 1, 2단계를 거쳐 ‘결정적인 순간’이라 불리는 3단계로 곧바로 옮겨갔다. 뇌에 프로그래밍 돼 있던 매뉴얼이 자동으로 작동한 것이다.
아시아나 승객들은 운이 좋았다. 첨단으로 설계된 비행기에 타고 있었고 잘 훈련받은 승무원들도 만났다. 그러나 모든 재난에 이런 도움과 행운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방대한 인터뷰를 통해 재난 생존자들의 특성을 연구해 온 작가 아만다 리플리는 “평소 지진과 화재, 비행기 사고 등 각종 재난의 현실적 가능성을 인지하고 그 상황에서 살아남도록 훈련해야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9.11 테러 때 월드트레이드 센터에 입주해 있던 모건 스탠리 직원 2,700여명은 최악의 참사 속에서도 거의 모두가 살아남았다. 일부 임직원들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실시했던 대피훈련 덕분이었다. 재난 상황이 발생하자 직원들은 1단계와 2단계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대피라는 3단계 모드로 들어갔다. 반면 희생자들은 대부분 우왕좌왕 하거나 소지품을 챙기는 데 시간을 허비하다 죽음을 맞았다.
평상시 잘 돌아가던 뇌도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반응이 일어날 때까지 반복훈련이 필요하다는 게 리플리의 조언이다. 재난영화 속 상황은 언제든 우리 앞의 현실이 될 수 있으며, 절체절명의 순간에 삶을 지켜주는 것은 신속한 판단과 행동뿐이다. 이것을 아시아나 참사는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고 있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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