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으로 역이민 하는 친구를 위해 몇 사람이 모여 송별모임을 가졌다. 와인을 곁들인 저녁자리였는데 와인은 50달러짜리 캬버네를 골랐다. 7명이 둘러앉아 몇 병을 마신 후 내게 마지막 와인을 고르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슬쩍 장난기가 발동해 ‘14 핸즈’라는 레이블의 25달러짜리 피노 느와를 시킨 후 75달러짜리를 주문했노라고 둘러댔다.
그리고는 한 가지 은밀한 실험을 했다. 25달러짜리 와인을 나눠 마신 후 “오늘 마신 와인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맛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더니 피노 느와의 진한 과일 향 때문이었는지 이구동성으로 마지막 것을 꼽았다.
식당에서 대단히 허술한 방식으로 이런 실험을 해본 것은 스탠포드 대학이 실시한 한 유명한 실험의 결과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의 발로였다. 연구진은 한 가지 와인을 비싼 레이블의 와인병과 싸구려 레이블의 와인병에 나눠 담은 후 실험 대상자들에게 마시도록 했다.
그 결과 비싼 병에 담긴 와인에 대한 만족도와 평가가 훨씬 높았다. 설문에서만 그렇게 응답한 것이 아니라 뇌 스캔을 해보니 실제로 비싼 병 와인을 마실 때 훨씬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와인인데도 가격에 따라 느끼는 맛과 만족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만족이라는 것은 결국 주관적인 것이며, 가치에 대한 평가는 가격에 따라 크게 춤을 춘다는 것을 이 실험은 보여주고 있다.
내가 했던 장난 실험의 결과도 이런 과학적 실험이 보여준 결과의 연장선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14 핸즈가 비싸지 않은 와인임에도 정말 맛이 뛰어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앞서 마신 와인보다 비싸다는 설명에 좀 더 맛있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 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물건에 대해 느끼는 만족도가 객관적인 가치와 효용보다는 가격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격은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지만 종종 우리는 이런 숫자가 부리는 마법에 휘둘리고 속는다. 그래서 제조사들과 상인들, 식당 업주들은 이런 심리를 가격에 교묘히 반영해 손님들이 물건을 선택하고 집어 들도록 만든다. 실제의 가치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붙여 허영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아주 약간의 변화로 대단히 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기법도 쓴다.
가격의 끝자리를 9 혹은 99로 끝나게 하는 방식은 가격심리학의 고전에 속하는 기법이다. ‘99센츠 온리’ 체인은 이 숫자에 쉽게 현혹되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어 성공한 기업이다. 지난 4월 사망한 이 체인의 창립자 데이브 골드의 부고기사를 읽어 보니 그가 99센츠 온리 스토어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리커스토어에서 일을 도우면서 얻은 경험이 바탕이 됐다.
골드는 손님들이 1.02센트나 98센트의 가격표가 붙어 있는 물건은 잘 사지 않는 반면 99센트짜리들은 많이 집어 드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1982년 첫 99센츠 온리 스토어를 열었다. 체인은 급성장했으며 그는 지난 2011년 자신의 사업체를 16억달러에 매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리커스토어에서 98센트짜리보다 99센트짜리가 더 잘 팔렸다는 사실이다. 골드의 관찰은 같은 옷을 판매하는 캐털로그에 34달러로 가격 표시를 했을 때보다 39달러를 붙였을 때 24%나 더 많이 팔렸다는 조사와 일맥상통한다. 가격 끝에 붙이는 9라는 숫자는 소비자들의 판단에 이처럼 설명하기 힘든 묘한 작용을 한다.
다시 와인으로 돌아와 가격과 관련한 조언을 한 가지 하자면 식당에서 파는 와인의 경우 통상적으로 중간대 가격에 마진을 많이 붙인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다. 식당 메뉴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가격대의 음식과 와인을 놓고 고를 때 사람들은 동석자와 식당 종업원들의 눈치를 의식해 가장 비싼 것과 가장 싼 것은 피하고 중간으로 절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건희 와인’처럼 한 병에 수백만원하는 와인이나 고가의 명품 핸드백이 가격만큼의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는 대답은 하지 못하겠다. 어차피 각자가 느끼는 가치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이니 말이다. 하지만 수많은 제품들의 가격에 소비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계산한 거품이 끼어 있음을 기억한다면 어려운 시기에 좀 더 현명한 소비를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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