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에게 고정적인 지지층은 정치적 수명을 좌우하는 절대적 자산이다. 정치인생은 부침과 승패로 점철되게 마련이다. 정치인들에게 질곡과 위기가 닥칠 때 무조건적으로 밀어주고 믿어주는 고정 지지층은 이를 극복해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고정 지지층이 가장 단단했던 정치인의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흔히 ‘인동초’로 표현되는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이 가능했던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 한결같이 그를 성원하며 애정을 보냈던 지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지지층은 다수에는 못 미쳤지만 더할 수 없이 견고했다. 그는 이런 지지층을 기반으로 정치적 재기를 반복한 끝에 청와대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정치인을 향한 지지는 외형적 부피보다 밀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 수치상 아무리 높아도 밀도가 낮으면 상황에 따라 신기루처럼 증발돼 버리는 것이 정치인들의 지지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열성지지층의 규모와 밀도에 있어서 박근혜 대통령을 능가할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박 대통령은 35% 내외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갖고 있다. 이들의 충성도는 거의 ‘묻지 마’ 수준이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들이다. 박 대통령도 정치 입문 이후 탈당 등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고정지지층 덕에 정치적인 지분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대권의 발판이 됐다.
대통령이 갖고 있는 고정지지층은 국정운영에 효과적인 동력이 된다.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특히 대통령이 이념적 기반을 벗어나는 결정과 결단을 내릴 때 더욱 그렇다.
그런 측면에서 남북관계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어려운 숙제이면서 동시에 커다란 기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들보다도 획기적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대단히 유리한 정치적 여건을 갖고 있다. 북한에 대해 생래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보수층을 아우르고 남남갈등을 최소화하면서 관계개선을 시도할 수 있는 대통령은 단단한 보수지지층을 갖고 있는 박 대통령 밖에 없다.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는 종종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난 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해 바뀌어왔다. 진보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사회복지를 처음 정책으로 구현한 인물은 독일의 보수 정치인 비스마르크였다. 냉전이 한창이던 지난 1972년 미중 관계정상화를 이끌어낸 인물 역시 보수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었다. 닉슨은 ‘빨갱이’를 때려잡는 일에 앞장서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극우정치인이었다.
하지만 1960년 대선에서 패해 야인생활을 하던 닉슨은 강한 미국을 위해 이념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공산국가 중국을 개방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다지게 된다. 그의 이런 구상은 당시 공화당의 기본노선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만약 진보적 색채가 강한 대통령이 중국과의 수교에 나섰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보수의 맹공과 비판에 지레 꼬리를 내렸을 것이고 국론은 양 갈래로 나뉘었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겪어 온 수모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극우이지만 실용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닉슨이었기에 공산국가와의 관계정상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청와대에서의 몇 년은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호기가 될 수 있다. 경제 같은 분야는 대통령이 아무리 능력 있고 열심을 다한다 해도 외적 요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다르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의지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박 대통령은 얼마든 주도적으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밑그림을 그려갈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문제는 이런 기회가 자신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대통령이 제대로 깨닫고 있느냐는 것이다. 4성 장군 출신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안보라인 진용을 보면 조금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오늘부터 서울서 열릴 예정이던 남북 당국회담이 수석대표 ‘급’ 문제를 둘러싼 이견 때문에 무산된 것은 아쉽다. 신뢰 프로세스는 어차피 한쪽의 양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대승적 차원에서 형식논리에 너무 얽매이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쪼록 박 대통령은 집토끼들을 다독거리느라 남북관계를 파탄 낸 전임 정권의 우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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