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의식 속에 가장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환상의 하나는 순혈주의이다. 반만년동안 한 핏줄로 면면히 이어져 온 단일민족이라는 믿음이다. 물론 한국인들의 피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순수하게 보존돼 온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다른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혈통 민족이라는 믿음은 허구이고 신화일 뿐이다.
한국인들의 유전자를 분석해 보면 약 70%가 북방계이고 나머지 30%는 남방계로 나타난다. 과학의 발달과 역사연구 등을 통해 한민족이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과 교류를 통해 피가 섞여왔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됐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에 정착하는 외국인들이 크게 늘고 다문화 가정에서 많은 2세들이 태어나면서 순혈주의의 환상은 우리의 눈앞에서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다.
그러나 신념 앞에서는 과학적 사실조차 무기력해지기 일쑤다. 이것이 잘못된 신념을 바로 잡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반발을 키우는 역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다.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흔들리면서 순혈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배타적인 이념에 사로잡힌 일부 사람들의 공격성은 높아져 가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생물학자로 단일민족의 허구성이 지닌 문제점을 꾸준히 제기해 온 최재천 교수는 이 때문에 그동안 견디기 힘든 비난과 언어폭력에 시달려왔다고 털어놓는다.
얼마 전 싸이의 ‘강남 스타일’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리틀 싸이’로 유명해진 황민우군이 어머니가 베트남인이라는 이유로 집단 린치성 악플 테러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는 황군 악플 테러는 순혈주의라는 신화 속에 내재된 폭력성을 보여준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순수함에 대한 추구는 바람직해 보인다. 하지만 순수함에 대한 집착 속에는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과, 섞인 것은 불순하고 열등하다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이 드러내는 혼혈에 대한 거부감은 이런 두려움과 고정관념에서 비롯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정관념은 잘못된 것임이 최근 일련의 생물학적 연구들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다윈 이래 가장 뛰어난 생물학자로 칭송받고 있는 윌리엄 해밀턴은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섞이면 섞일수록 강해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현대 생물학은 해밀턴의 소신이 옳았음을 뒷받침하는 연구 성과들을 쏟아내고 있다.
섞임은 개별적인 생명체뿐 아니라 조직과 사회까지도 강하게 만들어 준다. 오는 25일 벌어지는 유럽 챔피언스 리그 축구 결승전은 독일팀끼리의 대결로 치러진다. 1970년대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독일축구는 쇠락의 길을 걷다 2000년대 들어 다시 과거의 위용을 되찾고 있다. 올 챔피언스 리그가 바로 그 증거이다.
독일 축구의 부활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국가대표팀 순혈주의의 포기를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가 모두 독일이이 아니면 독일 대표팀 선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은 순혈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터키, 폴란드 등 다른 피가 섞인 선수들을 대거 대표로 발탁했다. 지금의 강한 독일 축구는 이런 조치의 산물이다. 대표팀 순혈주의의 포기는 축구를 넘어 독일사회의 통합모델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독일축구를 예로 들 것도 없이 미국이 왜 강한 국가가 될 수 있었는지 되돌아만 봐도 섞일수록 강해진다는 명제의 타당성은 확인된다. 다른 핏줄과 다른 문화 출신자들에 대해 대부분의 국가들은 동화정책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미국은 동화정책에 머물지 않고 각자의 정체성을 최대한 존중해준다. 일부 보수 세력에 의해 영어공용어화 캠페인이 끈질기게 추진되고 있음에도 한국어로 선거 안내를 받고 운전면허 등 각종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곳이 미국이다.
한국에서 이런 단계의 포용과 열린 마음을 기대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다른 피가 섞인 사람들도 같은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해 주는 기본적인 예의와 인식만은 갖췄으면 한다.
순혈주의의 환상을 벗어나자는 것은 연민을 가져달라는 호소가 아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자는 말이다. 작은 국토에 고령화와 저출산의 재앙에 직면해 있는 나라가 번성하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갇힌 생각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한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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