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치를 설명할 때 그것이 지나치게 장황하거나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설명하는 사람이 핵심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면 된다. 핵심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있다면 아주 짧은 설명으로도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말이 길어지고 어려워지는 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첫 번째 국정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창조경제’를 둘러싼 논란이 시끄럽다. 창조경제의 개념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볼멘 목소리가 일반 국민들과 기업들은 물론 집권세력 내부에서까지 터져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이 창조경제의 주무부처로 의욕을 가지고 신설한 미래창조과학부 관료들조차 이 슬로건의 정확한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 듯 해석이 제각각이다.
이런 반응이 너무 답답한 지 박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조경제가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하고 다닌다. 대통령이 설파하는 창조경제론을 들으면 조금 윤곽이 잡히기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거대한 의미의 추상적 어휘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공약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진 인사조차 한 인터뷰에서 “멀리서 보면 좀 애매한 요소가 있다”고 인정했다니 단기간 내에 창조경제라는 철학이 경제현장에 완전히 스며들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청와대에서 MS 설립자인 빌 게이츠 회장을 접견했다. 혁신의 상징인 게이츠는 박 대통령이 추구하는 창조경제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대통령으로서는 창조경제에 대한 게이츠의 지지를 기대했을 것이다. 당연히 면담에서는 서로를 추켜 주는 덕담이 오고 갔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공감이 오고 갔을지는 의문이다. 면담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를 바라보는 철학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의 주창자이다. 창조적 자본주의는 창조경제와 비슷하게 들리지만 의미는 사뭇 다르다. 게이츠는 탐욕스럽게 자신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존의 자본주의 패러다임으로는 성장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주장한다.
기업들이 소외된 계층을 보듬어 주고 이들과 공존을 모색할 때 새로운 시장이 생기고 지속가능한 자본주의가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창조적 자본주의란 결국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를 뜻한다. 게이츠는 이런 철학을 실천하는 의미로 거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창조적 자본주의의 핵심 키워드는 ‘선순환’이다. 복지와 분배, 그리고 가진 자들의 기부 등을 통해 돈이 잘 돌게 되면 그것이 바로 경제를 튼튼하게 만들고 살찌우는 자양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자리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순환은 건강의 척도이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시스템이든 똑같다. 잘 돌아야 건강한 법이다. 복지와 분배가 잘 이뤄진 국가일수록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 충격에도 별로 흔들리지 않게 된다. 지난 몇 년 간 지속된 경제위기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념조차 이해하기 힘든 ‘창조경제’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 자본주의’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본인이 인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 대통령은 이미 창조적 자본주의와 내용이 비슷한 공약을 내건 바 있다. ‘경제 민주화’가 그것이다. 양극화 해소를 목표로 하는 경제 민주화는 창조적 자본주의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제 민주화 공약은 대기업들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물 건너가는 듯한 느낌이다. “대선 공약인 만큼 지키기는 하겠지만 대기업들을 너무 몰아세우면 안 된다”는 말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다. 경제 민주화는 슬쩍 외면하면서 뜻 모를 창조경제라는 슬로건만 되풀이 하니 건강습관의 중요성은 무시한 채 설파하는 건강론을 듣는 것처럼 불편하다.
창조경제가 내세우는 혁신은 실패에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 싹을 틔운다.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을 잘 갖춘 국가들일수록 실패를 두려워 않는 혁신에의 도전이 활발하다.
박 대통령의 창조경제도 결국은 경제가 잘 돌아가게 해 일자리를 늘리고 국민행복을 높여주는 것이 궁극적 목표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 민주화야말로 일자리를 ‘창조’하는 경제로 가는 보다 구체적이고 빠른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경제 민주화를 외면한 창조경제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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